풀은 장기에 걸쳐 가변적인 형태와 매체로 확장되는 동시대 미술의 작업생산방식을 고려하여 프로덕션 과정에서 벌어지는 연구, 토론, 해외 레지던시 체류, 스크리닝, pdf 프리젠테이션, 글, 서적 발간, 온라인 대화 등 작업 소개 방식과 형태를 다양화 하고자 합니다.

풀은 자체적으로 주관하고 주최하는 인하우스 전시사업 외에 국내외 미술기관, 사회단체, 작가, 독립기획자, 학교 등과의 협업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공동기획 프로젝트, 해외 레지던시 진출, 왭을 통한 컨텐츠 공유, 연계사업 등 외부 진출, 연계사업을 다양하게 확장합니다.

CURRENT

○ 전시명: 섬호광 A Lodestar
○ 작가: 금혜원
○ 기획: 신지이
○ 그래픽디자인: 강경탁(a-g-k.kr)
○ 공간디자인: 김형준
○ 기간: 2018년 10월 25일(목) ~11월 25일(일)
○ 오프닝: 2018년 10월 25일(목) 오후 6시
○ 장소: 아트 스페이스 풀
○ 관람시간: 11:00 ~ 18:00 (매주 월요일)
○ 후원: 서울문화재단
 
 
 

유물전유목遺物前游目[1]
 
신지이(아트 스페이스 풀 큐레이터)
 
 
가을이되니 담쟁이가 바스러져 가는 벽을 더 맹렬히 감춘다. 서까래에 뽀얗게 깔려있던 먼지가 아래쪽 움직임에 바짝 긴장하며 이리저리 동요한다. 흙발에 지저분해진 바닥에 빛이 길게 드리우자 비로소 원래의 모습, 집의 모습을 찾았고, 드디어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며 작가는 복잡해했다.
 
누군가의 가족사나 자전소설을 읽을 때 예견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여러 대에 걸친 가계도에서 당시 사회상을 엿보고, 삶의 이면과 성찰을 읽어내며, 종국에 그네들 인생의 기승전결이 어떻게 도래하는지 확인하길 기대한다. 금혜원이 펼쳐놓은 삼대의 이야기는 그런 기대를 어느 정도 충족하고 있지만 예견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외할머니에서 어머니로 이어지는 모계의 서사가 전쟁과 근현대사를 아우르며 단단하게 정리되어 있지만 이야기는 선형적으로만 흐르지는 않는다. 작가는 인간관계를 세심히 다루면서도 사건을 마무리 짓는 데에는 짐짓 무심하다. 그리고 때때로 이야기가 심연에 빠져버리는데, 그것은 극 속에 작자 자신을 적극적으로 등장시키기 때문이다.
 
오래된 테이블에 책이 세 권 놓여있다. 그들은 제각기 자전적 글쓰기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처음은 곧장 질러가고, 다음은 굴절하며, 마지막은 아주 커다란 원을 그린다. 첫 번째 ‘야행’은 작가의 외할머니가 작고하기 전 삶을 회고하며 쓴 6권의 노트에서 시작됐다. 금혜원은 조밀하지 못했던 할머니의 손글씨 기록들에 역사적 증언들과 시대의 전형성을 보태고 자신의 상념을 틈입시켜 현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자전적 소설을 만들어냈다. 두 번째 책의 화자는 돌연 어린아이가 되어있다. 겨우 찾아온 평화를 누릴 새 없이 피난민들로 가득 차버린 부산 집에서, 제 공간을 마련하겠다고 층계참으로 숨어드는 아이는 작가의 어머니이다. 마지막 진술은 한 바퀴를 크게 돌아, 말하기로 결심한 작가의 몫이다. 단어와 물건을 세심하게 솎아내고, 기억을 되새김질하니 운문과 산문 사이의 글이 몇 편 나왔다. 아주 소소하고 사소한 이야기들이다. 밥을 지었고, 많은 것을 포기했으며, 그러는 중에도 내 자리를 요구했던.
 
벽에 걸려있는 옛 사진들은 1940년부터 1970년 무렵까지 찍힌 것들이다. 부엌, 피아노가 있는 방, 집 앞, 동물원 등 특별할 것 없는 장소들로, 보다 정확히는 그 공간들을 하나의 정물처럼 바닥에 놓고 재차 찍은 사진들이다. 작년 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이 전시의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사진들을 보았던 이라면 인물들이 빼곡한 사진들을 기억할 것이다. 누가, 어떤 사연으로, 어디에서 연루되었는지 소상히 적은 메모도 함께 있었다. 아트 스페이스 풀에는 ‘가족사진’이라 이름 붙은 ‘풍경사진’들이 걸려있다. 회색조의 빛바랜 사진은 익숙한 듯 하면서도 이질적인데, 그것은 아마 사진에 인물이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에는 카메라가 상용화되기 이전이라 정보와 상징이라는 목적 없이 재미삼아 풍경을 찍기 어려웠을 것이라 짐작해보면 ‘풍경사진’이란 대단히 기묘한 장면인 것이다. 전시는 두 개의 큰 축으로 나뉘어 있다. 한 축은 기억을 바탕으로 시간을 조밀하게 ‘채워’가는 글 작업이며 다른 하나는 특정 서사에서 기억을 ‘비워’냄으로써 시간을 길게 늘어트리는 사진이다. 금혜원의 <가족사진 시리즈>는 인물을 모두 지우고 빈 곳의 배경을 조심스럽게 복원해낸 조작된 사진이다. 누군가가 그곳에 존재했다는 너무나 온당한 사실이 삭제되자 마치 앞선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현존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아니, 그러면서도 실은‘모든 기억’에 존재한다고 역설해 버린다. 누구의 집, 누구의 부엌, 누군가와의 추억에서 특정한 ‘누구’를 지우니 보는 이로 하여금 개개인의 어떤 기억을 환기시키기에 충분해 졌다. 주체의 자리에 불특정 타인의 임의의 기억들이 스며들 틈이 생긴 것이다. 이는 ‘나’, 개인이라는 작은 테두리로 이야기가 환원되는 것을 거부함과 동시에 수평적이며 비선형적으로 확장된 하나의 세계로 가족을 경험하게 한다.
 
전시는 아주 농밀한 가족의 서사에서 시작하지만, 점점 인물들이 희석되어 가더니 급기야 공기 중에 흩어져 버린다. 전시장 곳곳에 40년은 족히 되는 가구들과 물품들이 자리해 있다. 모두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들이다. 물건들에도 말과 기억이 있다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세상에는 책도 그림도 영화도, 재현이라 불리는 그 무엇도 필요 없을지 모르겠다. 그저 귀 기울이면 온갖 풍요로운 미시사에 세상은 터져버릴 테니까. 경험을 소설로 재구성한 작가는 그것을 전시장에 놓아두는 한편, 곳곳에 ‘목소리’로도 숨겨 두었다. 처음 할머니의 삶을 구전으로 들었을 그때의, 고목의 기억에 공명하는 아이처럼.
 
지난 2년간 작가는 지난한 리서치의 과정을 보냈다. 강박에 가까운 고증을 통해 재구성한 이야기는 사건과 사고(思考)들의 연쇄로 가파르게 70여 년의 세월을 훑는다. 우리는 모두 이야기를 사랑한다. 그것이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간에, 감동을 주거나, 고통을 주기에 이야기에 매료되어 듣고 읽는다. 그러나 이야기를 ‘쓰는’ 것은 단순히 매료나 사랑으로 설명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이 가족과 자신의 내밀한 부분의 발설이 전제된다면 더더욱. 미셸 레리스Michel Leiris는 자신의 자서전 『성년(L’Age d’homme)』의 서문에서 글쓰기를 투우에 빗대어 말한다. “(황소의) 뿔이 내포하는 구체적인 위협 때문에 투우사의 기교에 유일하게 인간적인 현실을 부여하며, [...] 위험을 무릅씀으로써 그 어느 때보다 탁월해질 수 있는 기회를 끌어내는 투우사, 가장 위험한 순간에 자기 스타일의 장점을 모두 보여주는 투우사”가 그가 감탄하고 되고 싶은 것이라 말한다. 물론 금혜원의 이야기가 황소의 뿔처럼 어떤 구체적인 위해를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레리스가 짚어내 듯) 책을 낸다는 건, 자신 뿐만 아니라 타인을 위한 행위라는 점에서, 그를 바라보는 방식이 전과는 더 이상 같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일정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앞서 금혜원의 이야기를 두고 소소하다 표현하였지만, 결코 이야기가 소박하다거나 평범해서 썼던 말은 아니다. 그들을 둘러싼 풍파와 격정들이 예삿일로 여겨질 만큼 너무나 나의, 우리의 여인들에 대한 얘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선택과 그로 인한 성장의 근거를 가족으로부터 추적해 들어가는 많은 서사들에서 유독 모계에서 당위를 찾거나,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며 발화된 매체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 새삼 놀랍다


[1]장파(張法)는 그의 저서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에서 ‘보기’라는 대상 인식의 방식으로 눈 돌리기(유목游目)와 초점(焦點) 맞추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눈 돌리기에는 사람과 시각의 ‘움직임’이 포함된다. “한걸음 한걸음 옮기면서”, “면면을 살피기”를 통해 우주를 획득하고 우주를 획득함으로써 자아를 획득하고자 하는것이 동양의 방식이다. 반면 초점 맞추기는 고정된 위치에서 고정되어 있는 시각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서양의 방식이다. 이는 사물을 감상하는 최적의 시점을 찾는 적합성의 과정이지만 어떤 사물은 절대 명료하게 보지 못한다는 ‘허무’를 포함한다고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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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명: 코스믹 조크 Cosmic Jokes
○ 작가: 노재운
○ 기획: 안소현
○ 그래픽디자인: 강경탁(a-g-k.kr)
○ 공간디자인: 김형준
○ 기간: 2018년 8월 30일(목) ~10월 14일(일)
○ 오프닝: 2018년 8월 30일(목) 오후 6시
○ 장소: 아트 스페이스 풀
○ 관람시간: 11:00 ~ 18:00 (매주 월요일, 9월 23일-25일 휴관)
○ 후원: 문화체육관광부,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노재운 개인전
코스믹 조크

안소현(아트 스페이스 풀 디렉터)
 
 
"좋은 예술에는 항상 우주적 농담이 있다고
그대들은 속삭인다. 진짜?" (5「지옥」[1])
 
 
노재운은 문학이나 영화의 한 장르인'코스믹 호러(cosmic horror)'를 참고하여 '코스믹 조크'를 제안한다. '코스믹 호러’에서 공포는 인간이 가늠할 수 있는 범위를 초월하기에, 인간은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렇다면 '코스믹 조크'라는 장르가 있다면 어떨까?노재운은 묻는다. 세계의 속도가 너무 빨라 무력해진 인간의 웃음은 자조적이고 허탈할까, 아니면 오히려 긍정적이고 적극적일까?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한 힌트는 물론 노재운의 작업이다. 어쨌거나 그가 생각하는'좋은 예술'이 무엇인지 더듬어가다 보면 우주적 농담이 무엇인지 알게 되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게 된다. 노재운이 끊임없이 이미지를 캐내오는'기억의 우주'라고 부르는 영화사 안으로 따라들어가보거나[2]'본생경'이나 '목련존자'의 이야기들을 찾아 읽어보면 뭔가 좀 더 손에 잡히는 것을 얻게 될 것 같다.
 
그런데 막상 작가는 작품의 원인과 모티브를 제시하고 배경 이야기를 읽게 하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반대로 그는 선후관계가 없고 하나로 묶을 수 없는 것을'비헐리우드적'이라 부르며 긍정한다(17「인터페이스 매뉴얼」). 또"인과율과 내러티브라는 영화의 보편적 속성들을 완전히 먹어버린 슈퍼 내러티브의 세계"(20「세계의 심장」)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그렇다면 노재운의 작업을 비헐리우드적 방식으로 읽을 수  있을까? 위 문장으로 돌아가보자. 글에서 '그대들'은 코미디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버스터 키튼(Buster Keaton),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 자크 타티(Jacques Tati)를 가리킨다. 이들의 코미디는 노재운이 말하는 헐리우드의 전형과는 거리가 멀다(그들 각각은 헐리우드에서 밀려나거나 거부되거나, 헐리우드를 거부했다). 분명 이 영화들의 내용이 노재운 작업의 직접적 주제가 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들이'속삭인' 것들, 그들이 웃음을 주는 방식은 노재운의 작업과 세상을 보는 태도와 묘하게 겹친다.
 
 
하나. 우리는 못 보는 것을 그는 보고 있다 

코미디 영화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기본 장치 중 하나는 등장인물은 볼 수 없지만, 관객은 볼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관객들은 양쪽을 대조하면서 때로는 인물의 예정된 실패를 알고 킬킬거리고, 때로는 인물은 깨닫지 못하는 극복과 성취를 보며 흐뭇해 한다.
 
노재운은 코미디 영화의 관객의 위치에서, 관성에 갇힌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주시한다. <요한에게-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문>(1996)은 존 페리 발로우(John Perry Barlow)의"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문"의 텍스트에 어느 도시의 '구글어스'의 이미지들, 북한 영화<홍길동> (1986, 조선 예술영화제작소 제작)에서 발췌한 장면들을 결합한 영상이다. 20여 년 전에 발표된 발로우의 글은 사이버스페이스의 도래에 대한 희망에 부풀어 당시 현실 권력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호기로운 선언문인데, 현재의 사이버스페이스에서 규제와 통제를 강화하는 상황과 대조적이다. '구글어스'는 놀랍도록 정교한 실사 이미지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현실 이데올로기의 경계를 완전히 넘어서지는 못한다(한국이나 러시아의 서비스 규제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래서 노재운은 한편으로는 현실에서 부족한 자유를 보충하려는 듯 정처 없이 사이버 세계의 도시를 훑고 다니고, 다른 한편으로는 빠른 스크롤을 이용해 현실 이미지를 초/비현실적으로 만든다. 또 북한의 최고 흥행 영화<홍길동>(1986)에서 발췌한 이상향을 꿈꾸는 영웅의 몸동작을 반복 편집하여 기묘한 허무감을 만든다. 노재운은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자유를 그리던 사람들이 예견된 실패를 향해 달리고 현실의 한계에 부딪히는 것을 지켜보기도 하고, 그들이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꿈꾸는 세계를 이미지로 구현한다. 그는 코미디 영화의 충실하고도 진지한 관객인 것이다.
 
 
둘. 기하학적 공간  
 
세 감독의 영화에서는 기하학적 형태의 공간이 자주 등장한다. 동일한 기하학적 형태가 반복되는 공간은 거기서 인물이 빠져나오는 데 애를 먹거나 같은 동작을 반복하게 해서 슬랩스틱 코미디의 웃음을 유발하며, 그 반복적 형태만으로도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내기도 한다. 원형 공간을 맴도는 장면에서는 웃음과 더불어 반복되는 삶의 안쓰러움이나 세기말적 정서를 드러내기도 한다. 회전하는 개체들은 무력하고 나른하기도 하고(타티), 씁쓸하기도 하고(채플린), 아슬아슬하기도(키튼) 하다.
 
노재운도 기하학적 형태의'효과'에 관심을 갖고 작업의 모티브로 활용해왔다. 영화사에 나타났던 스크린의 다양한 비율을 적용한 판으로 구성한 공간('화면비' 시리즈)은 우리의 시각 조건의 변천사를 보여준다. 작가가 런칭한'C12픽쳐스'의 대표적 기법으로 소개한 '평상숏' 역시 마찬가지다. 그에 따르면 사방이 열린 높이 45cm의 평상은 '친밀한 시공간'을 가능하게 하며, 모든 각도를 소박하게 연결한다. (25「평상의 높이」)
 
그리고 노재운은 오늘날 시각에서 가장 지배적인 프레임 형태는 소셜 네트워크'인스타그램'의 정사각형이라고 주장한다. <인시네마그램>(2018)은 이 정사각형 프레임 안에20세기 영화의 장면들을 밀어 넣은 것이다. 정사각형은 획일적이지만, 거기에 다른 시대의 다른 비율의 이미지들이 결합한 것이 어딘가 생경하게 느껴진다면 이 기하학적 형태는 분명 어떤 패러다임을 읽는 기제로 작동할 수 있다. 
 
 
셋. 시공간의 이상한 조합 
 
코미디 영화에서는 종종 시공간의 이상한 조합이 나타난다. 일상적이고 익숙한 시간의 흐름보다는 엄청나게 빠르거나 느린 시간이 설정되기도 하고,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공간적 연결도 자주 등장한다. 그래서 이미지에 컴퓨터 그래픽이 적용되기 전에는 위대한 코미디 영화배우들은 대부분 위대한 스턴트맨이었다. 그들은 신체 단련을 통해 일상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속도나 움직임을 만들어냈고, 오늘날은 특수효과가 그 역할을 대체하게 되었다. 스턴트와 특수효과는 진행 방식과 원리는 전혀 다르지만(반대인 것 같지만), 결과의 이미지를 보면 결국 지향하는 바는 같다. 특정 시공간에서 제약이 크거나(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이미지로는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면 중력과 신체적 한계가 없는 것 같은 장면을 만들거나 시공간의 예상치 못한 조합을 만드는 것이다. 
 
시공간의 이상한 조합은 노재운이 즐겨쓰는 작업 방식이다. 이미 언급한<인시네마그램>도 그에 해당하며, 여러 기술낙관론자가 인류사의 분기점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2045년의 달력을 만든 <특이점 달력>이 대표적인 예이다. <목성>은20세기 아방가르드의 악보와 영화사에 등장했던 화면비를 조합한'화면비 악보' 시리즈 중 하나이다. 역사적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기존의 기보법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소리나 리듬을 표현하기 위해 이른바'그래픽' 악보를 만들었다. 악보는 원래 시간을 공간으로 표현한 것이지만, 그들은 그런 공간적 성격을 더욱 극대화하여 악보를 시각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바 있다. 노재운은 거기에 영화사라는 시간 축에 등장했던 공간적 비례들을 결합하여 그야말로 시공간의 복잡계를 구성한다.  
 
노재운은 특수효과의 세상이 확대되면, 점차 자연이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영화나 게임, 그래픽 세계에서 지팡이는 그런 사라짐, 이동할 수 없는 것을 이동시키는 효과를 만들어내는 가장 전형적인 도구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런 기술적으로 전능한 지팡이보다는 기술발전의 속도에 함몰되지 않은 새로운 특수효과를 꿈꾼다. 세상이 점점 재난의 과포화 상태가 되면 병원선의 신경 외과의는 누구보다 분주해질 것이며(<병원선>), 인간의 뇌도 점차 사라질 것이다(<뇌사경>)! 그런 생각을 하면 키튼과 채플린의 지팡이, 타티의 우산이 어쩐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그 작은 소품이 만들어내는'피식' 웃음은 소심한 인간이 시도한 특수효과일 수 있다.   
 
 
넷. 매혹의 대가 
 
코미디 영화에서는 많은 사건이 매혹으로 인해 일어난다. 왠지 끌리는 사소한 물건에서부터 지독하게 사랑하는 사람까지, 매혹은 사람을 집착하게 하고, 무모하게 하고, 결국 아슬아슬한 순간들에 처하게 한다.
 
노재운은 영화사라는 기억의 우주에 매혹된다. 세계는 점점 비극으로 채워지고,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남북한의 정세가 한 치 앞을 모르게 펼쳐지는 복잡한 상황을 마주할 때면 그는 영화사의 이미지와 대사들을 발췌한다. 때로는'발췌'라는 행위 자체가 정서를 증폭시키면서도 섬세하게 만들기도 한다. 노재운이'메타그라피'라고 이름한 텍스트 조각인 <#죽지않고살겠다>는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치카마츠 이야기>(1954)의 대사를 발췌해 만든 것이다. 자살 직전 남자가 여자에게 뒤늦은 사랑 고백을 하자 여자는"죽지 않고 살겠다!"고 말한다. 혹자는 이 영화가 지독한 비극의 끝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희한한 영화라고 했다. 노재운은 칼 마르크스의 문장을 발췌 변형한다. "시간은 반복되네 한번은 느와르 한번은 에스에프로."(27「-Noir-SF-」)    
 
코미디 영화에서 정념(passion)을 드러내는 방식은 일반적인 드라마에서와는 다르다. 코미디의 거장들은 키튼의'스톤 페이스'에서 알 수 있듯, 격한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미세한 몸짓과 표정으로 정념을 표현한다.[3] 타티는 주인공 윌로의 동작과는 무관한 소음들을 녹여 넣어 친근하고 아련한 톤을 만든다. 노재운은 때로는 영상의 발췌, 지연, 반복을 통해 정념을 강조하기도 하고, 때로는 해당 장면을 픽셀이 보이도록 확대해서 보여주기도 한다. 이때 픽셀은 서로 다른 시간의 영상 이미지를 병치시킨 증거인 동시에 정념을 미세하게 쪼개는 장치이기도 하다.

"만약,
정서에도 입자가 있다면
일련의 이미지들로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이제 우리는 소립자의 수준에까지 내려가지 않으면 안된다."
(32「보편적 남녀」)
 
  
노재운은 채플린처럼 하염없이 넘어지는 세상을 관찰하고, 키튼처럼 효율과 먼 장치들을 고안하고, 타티처럼 세상의 미세한 소리들을 끌어안는다. 노재운의'코스믹 조크'는 호탕한 박장대소를 허락할 리 없다. 정교하고 반듯한 공간과 뒤엉킨 시간과 발췌한 이미지들은 무력한 인간들의 얼굴에 잠깐 비칠 듯 말 듯한 웃음을 선사한다. 그것은 신기할 것 없어'특수한' 효과같아서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화면비의 변화가 우리의 시각계를 뒤집어놓았듯 세계의 무너져내림을 잠깐 정지시킨 뒤, 그 몰락의 방향을 뒤집을지 누가 알겠는가. 노재운의 작업에서 미세한 엇박자와 끊김을 감지한다면, 일단 피식 웃고 나서 생각해보라. '방금 무언가 뒤집어진 것은 아닐까?'

 
 

[1]본문 중 괄호 안의 표기는 노재운의 책『코스믹 조크』(2018)에서 인용한 것으로, 글 제목과 번호를 붙였다.
[2]노재운의<오 솔레미오>의 장면을 발췌한 원작 영화<서울의 휴일>(1956)에 대해 영화평론가 유운성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이런 시도를 한 바 있다. "나이트 스터디",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2016년11월30일.  
[3]그래서 노재운은 정당하게도, 키튼, 채플린과 더불어 무성 코미디 영화의3대 감독 중 하나인 해롤드 로이드(Harold Lloyd) 대신 타티를 선택했다. 로이드는 표정이 지나치게 풍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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