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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은 장기에 걸쳐 가변적인 형태와 매체로 확장되는 동시대 미술의 작업생산방식을 고려하여 프로덕션 과정에서 벌어지는 연구, 토론, 해외 레지던시 체류, 스크리닝, pdf 프리젠테이션, 글, 서적 발간, 온라인 대화 등 작업 소개 방식과 형태를 다양화 하고자 합니다.

풀은 자체적으로 주관하고 주최하는 인하우스 전시사업 외에 국내외 미술기관, 사회단체, 작가, 독립기획자, 학교 등과의 협업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공동기획 프로젝트, 해외 레지던시 진출, 왭을 통한 컨텐츠 공유, 연계사업 등 외부 진출, 연계사업을 다양하게 확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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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스페이스
 
2017 풀 프로덕션 《노원희 개인전_담담한 기록: 인간사, 세상살이, 그리고 사건
 

○ 전시명: 담담한 기록: 인간사, 세상살이, 그리고 사건 

○ 작가: 노원희

○ 기획: 이성희

○ 그래픽 디자인: 강경탁(a-g-k.kr)

○ 공간 디자인: 신익균

○ 기간: 2017년 6월 1일(목) ~ 7월 2일(일)

오프닝 리셉션: 2017년 6월 1일(목) 오후 6시

○ 장소: 아트 스페이스 풀

○ 관람시간: 10:00 ~ 18:00 (월요일 휴관)

○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본 전시의 오프닝 행사는 몰타맥주Cisk와 함께 합니다.

 
 
 
세상의 삶을 응축하는 담담한 기록
이성희(아트 스페이스 풀 디렉터)
 
 
한 인간이 개인사의 변화와 굴곡을 끊임없이 성찰하면서 세상의 삶과 끈을 맺으려고 한다는 것. 노원희의 작품을 보면 그가 본 세상의 삶을 한 바퀴 돌아보고 왔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역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는 세상을 좀 더 넓게 인식할 수 있는 시선과 마음을 보상받은 것일까. 여성으로, 아내로, 엄마로, 교육자로, 시민으로, 화가로, 어느 역할 중 무엇 하나 소홀히 하지 못하고 처한 상황에 맞게 경중을 두며, 때로는 가늘고 뜸하게 때로는 뜨겁게 작업을 이어왔다.
노원희의 작품에서는 작가 자신과 주변인의 삶, 사회 현실이 실타래처럼 엮여 그것들이 서로를 투영하는 가운데 보편적 울림이 생겨난다. 그는 현실상황의 구체성을 확보하려는 노력과 그 불가능성에 인식론적 방법으로 다가서려는 실험 사이를 오가며, 그 과정을 그림으로 남긴다. 이번 전시에서는 정치사회적 현실에 대한 발언과 기록을 다양한 어법으로 표현한 작품들과 작가 개인과 주변인들의 일상과 삶의 무게를 드러내는 이전 작품들을 병치한다. 40여 년의 작업활동에서 노원희의 신작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강건하고 사무친다. 세상의 고통에 통감하는 그의 그림들은, 말없는 그림의 말을 반복하며 외치고 있다.
 
현실, 반응(1973-1990)
 
그는 1960년대 후반 대학신문사에서 기자로 활동하면서 사회적 현실에 관심을 갖게 되고, 1973년 대학원 졸업 후 대구로 귀향하여 강의를 하며 야학, 운동권 학생들도 만나고 참여문학론이나 사회 전반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현실인식을 구체화했다. 이후 작가는 잘 알려진 대로 ‘현실과 발언’(현발)에 참여한다. 현발 창립 동인전 및 이후 특유의 예민한 서정과 현실감각이 돋보이는 그림들(<거리에서>(1980), <한길>(1980), <나무>(1982) 등)을 제작했다. 1977년 문헌화랑의 첫 개인전, 1980년 관훈미술관에서의 두 번째 개인전 이후 1982년 동의대에 부임하면서 부산과 대구를 오가는 상황에 아이까지 낳으면서 그에게는 한 동안 피할 수 없는 공백기가 찾아왔는데, 이후 학내 소용돌이에 휘말려 현실의 무거움은 커져만 갔다. <긴급뉴스>(1986)에서 화면을 장악한 텔레비전은 불안한 시점으로 발화하는 내용의 긴급성을 알리는 듯하고, 그 뒤로 양복을 입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경직된 표정과 손모양으로 상황의 심각성에 당황한 듯 보인다. 날로 절박해지는 사회적 현실과 더불어 작가 개인의 삶의 무게가 더해져 불안의 심리적 상황을 전면으로 표출한 작품이다. 그는 그림에서라도 현실의 피로감을 덜고 싶었던 걸까, <가족3>(1986)에서는 어머니와 아버지와 어린 아기가 잠든 모습이 애처롭고도 평온해 보인다.
노원희는 재직 중이던 대학에서 1986년 시국선언에 참여한 이후, 1987년 같이 성명에 참여한 동료 교수의 해직철회와 학원민주화 요구, 단식농성 등을 이어가며 불편한 교직 생활을 감내한다. 시국선언에 참여한 것이 빌미가 되어 그림마당 민 개인전(1986) 후 예정된 학내 갤러리 개인전도 취소 당했다. 이후 1989년 동의대 5.3사건으로 학내갈등이 더욱 고조되어 휴교조치까지 내려지고 교수사회도 혼돈에 빠진다. 작가는 당시를 회고하며 이러한 상황을 왜 그림으로 기록하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러나 학내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바로 옆에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림으로 작업할 욕구를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그림이 저항과 발언의 한 축으로서 작동하기 위해선 작업을 하는 주체가 그 현실과 약간의 거리를 두어야 가능한 건 아닐까. 행동해야 하는 그 절박한 상황과 회화라는 매체의 시간성은 꽤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
노원희는 사회 참여운동과 그 현실을 반영한 그림, 혹은 사회적 현실 이면의 담담한 삶의 모습을 그림으로 옮기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며, 미술이론과 거리를 두고 자기만의 조형어법을 만들어내는 데 천착했다. 1990년 타워미술관 개인전 도록에 실린 작업노트에는 노동자의 당파성에 기반해 전형성을 창출해야 한다는 미술운동 이론과 작가가 추구하는 사회심리주의적인 작업 사이의 갈등이 표출되어 있다. “미술운동의 이론이 날카로워질수록 나는 흔들린다. 정서적 반동을 겪는다. (...) ‘강고한’ 이론체계와 목적론을 자신 있게 장악한 그림은 불가능한 것일까. ‘흔들리고 불안해 하며 강하기도 약하기도 한’(김영현,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모순투성이의 인간들이 갖는 인생의 정서와 변혁에 대한 열망과 번뇌의 원천이자 희망이다.”
 
집, 가족, 세상살이(1990-2008)
 
1990년대부터 노원희는 가족과 일상의 굴레에서 세상의 현실을 바라본다. ‘집’이라는 소재는 가족과 일상을 이야기하는 출발점이 되며, 이를 변주하여 가족, 도시화, 방랑, 떠남, 그리고 회귀를 표현한다. 평론가 장미진은 작가가 초점을 두고 있는 ‘집’은 사회나 환경의 변화 속에서 개인의 삶을 규제하는 단위로 해석되는 한편 현대사회에서의 마지막 남은 인간적인 행복의 이미지를 암시한다고 설명한다. 그는 자신과 주변인의 삶, 현재와 기억, 있음과 없음 등의 프레임으로 ‘집’을 형상화하기도 하고 심리적 이미지로 그 의미와 상징성을 반추하기도 한다. 작가가 집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된 계기를 유추하는 데는 공원에서 얻게 된 익명의 개인과 가족 사진들이 단서가 된다.
1980년대 후반 노원희는 주말이면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아이와 함께 공원에 자주 드나들었고, 그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도시 서민들이 주말을 즐기는 일상의 장면으로 기울었다. 그때 공원 사진사에게서 우연히 건네 받은 상자에는 공원에 놀러 온 사람들을 찍어준 사진을 우편으로 보냈으나 반송된 사진들이 수북이 담겨 있었다. ‘수취인 불명’이라는 도장이 찍혀 반송된 봉투들에 담긴 사진들, 그는 거주지가 자주 바뀌는 서민들의 임시적 삶을 위로하듯 사진 속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의 삶을 화면으로 끌어내 그들이 마치 자신의 가족이나 주변인인 듯 그려냈다. 알지도 못하고 본 적도 없는 이들의 삶을 사회현실의 상황에 빗대어 공감하며 시대의 기록을 만들어낸다. 이들의 모습은 오래 시간 노원희의 작품에 등장한다. 사람들이 떠난 스산한 공원에 놓인 가족 사진 <공원2>(1986), 노동자인 듯한 남성을 공단 풍경을 배경으로 연출한 <공단부근>(1990), 시골 언덕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어머니>(1990),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간 남자 위로 흰색 한복을 입은 어머니의 형상 <역마살-어머니>(1995), 집에 쌓이는 각종 종이들(영수증, 고지서, 학습지, 신문지, 관리비표 등)이 짜깁기된 화면에 드로잉을 한 연작 <가족>(1998), 퇴색된 스산한 집에 날아든 편지의 수취인 불명 도장 <수취인 불명>(2001), 공원 사진에서 사람들이 앞을 보는 모습을 뒤로 돌려서 죽음에 대해 앞당겨 생각하는 <공원을 떠나는 시간>(2016) 등 최근 작업까지 이어진다. 노원희의 작업에서 이들은 작가의 가족이자 모두의 가족, 즉 보편적인 의미의 가족이다.
그런가 하면 그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집’의 다양한 형태를 기록하여 주거양식 변화와 가족의 해체에 대해서도 다룬다. 도시화 현상이 발생시킨 가족의 해체, 이주, 방랑의 소재는 전통적 이미지의 집과 나무, 골목 풍경, 그리고 도시 아파트 풍경을 통해 다루어진다. 노원희가 표현하는 가옥의 모습에서 시골집은 향수와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소재이며, 아파트는 그 정서를 깨뜨리고 가족의 의미를 해체시킨 부정적인 소재이다. “삶의 중심이며, 그 의식의 흐름을 조용히 거두어주는 우주의 중심으로서의 집” <집> 시리즈, 홍수로 반쯤 잠긴 집 <비스듬한 집>(1998) 등은 시골집에 대한 작가의 막연한 향수를 담아 떠나는 집을 기록하는 그림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파트 건물을 배경으로 아이를 들쳐 업고 울면서 어딘가를 향해 가는 여인의 모습 <울지마세요>(2005), 갑갑한 현실을 반영하듯 돌로 변한 듯한 여인의 모습과 아파트 <집 구하러 다니는 사람>(2006), 잡다한 소음과 어지러운 현실에서 도피하듯 화면을 가득 채운 숲 안으로 사라지는 남자와 저 먼 곳의 아파트 <사라지는 모습>(2001) 등에서는 전통가옥을 대체하고 가족의 생활양식까지 뒤바꾼 도시 아파트에 대한 부정적 시선이 전해진다.
 
진혼제, 말없는 말, 연극무대(2010-2017)
 
노원희는 몇 년 전 서울로 이사오면서 다시 눈 돌릴 수 없는 세상의 사건들과 삶에 다가간다.
<청와대 길목1>(2014)은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의 상실의 슬픔과 고통이 심리적으로 재현된 작품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시위하고 있는 텐트와 그 앞에 무기력하게 서있는 경찰들의 뒷모습을 그린 그림이지만, 투명한 막이 씌워진 듯한 텐트와 그 앞의 하얀 피켓, 그리고 어두운 파란색 색조가 실제의 장면을 퇴색시켜 초혼의 모습처럼 느껴진다. 작가의 현실인식은 거의 30년의 시차를 두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1986년 작품 <묻히는 사람들>과 <청와대 길목1>은 유사한 기운이 감돈다. <묻히는 사람들>(1986)은 뭍에서 물로, 인간이 자연과 융화되는 듯한 초현실적인 화면 구성으로 광주민주화 운동에서 무참히 희생된 영혼들을 달랜다. 화면 중앙의 흰 한복을 입은 여인은 가여운 이들의 넋을 달래고, 이내 여인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죽은 이들이 뭍 아래로 묻힌다.
<집으로 가는 길 2015.4.17>(2015)은 또 다른 진혼의 그림이다. 화면 양 옆 건물 사이 도로를 채운 거대한 덩어리 위에 작은 의자 하나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문득 세월호 1주기 추모집회 때 광화문으로 진입하는 모든 길, 심지어 골목길까지 빠짐 없이 차벽과 경찰들로 막아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기억이 스쳐간다. 이 그림에선 집으로 가는 길을 막는 공권력 대신 거대한 바위가 집으로 향하는 길을 지켜 준다. 희뿌연 작은 경찰들이 바위에 밀려 힘 없이 방패를 들고 그 틈을 어정쩡하게 메우고 있지만, 작은 의자는 거대한 바위의 비호를 받아 꼿꼿하게 자리를 지키며 집으로 돌아가는 주인을 위해 새하얀 천으로 하늘로 드리운다. 용산참사로 목숨을 잃은 도시 철거민들을 기억하는 <기념비자리-불타는 망루>(2010)에는 화재에서 꺼지지 않은 불씨 하나가 공중을 떠다니는데, 철거 예정인 삶의 터전들과 그 뒤로 매끈하게 솟은 고급 아파트 건물들의 대조가 스산한 기운을 배가한다.
노원희는 불합리한 폭력에 희생된 이들의 혼을 정화하는 의식으로써의 그림을 그리는 한편, 그 폭력의 현장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어떻게 강력한 고발의 이미지를 만들어낼 것인가 고민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행위와 사고의 혼란 속에 나온 “힘없는 그림”을 통해 성취된다. 말없는 피켓, 말이 쓰였다 지워지고 결국 다시 쓰인 피켓, 그 흰 피켓은 캔버스 안의 또 다른 빈 캔버스가 되어 작가의 고민의 흔적을 기록해 텅 빈 강렬한 이미지가 된다. 흰 피켓은 화면의 말없는 말의 이미지로 반복되고, 때로는 공허한 하늘의 일부가 되기도 하고, 최근작에서는 무대의 스크린으로 탈바꿈한다.
<말의 시작>(2016)과 <유죄 23년 상상체험관 - 일어서는 거짓말>(2016)은 말이 사라진 빈 피켓과 빼곡한 고발의 언어로 작가의 고민을 드러낸다. 전자에서는 세월호 진상 규명을 위한 분노의 글이 그려졌다 다시 지워지고, 후자에는 수 많은 이름들이 촘촘히 그려져 있다. 1991년 유서대필조작사건으로 누명을 쓴 강기훈이 2014년에 무죄판결을 접했을 때의 50세의 얼굴을 그려낸 이 작품에 대해, 작가는 작업노트에서 “국가권력의 비호를 받으면서 국가권력을 비호하는 수사기관과 사법부 관련 인사들의 비겁, 비열, 무책임, 편견에 찢긴 수많은 인생들 중 한 인생의 일, 유서대필조작사건을 모티프로 한 작업 과정은 힘들었다.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고발 욕망을 억제하는 일은 어려웠다. (...) 사람 이름들을 넣었다가 화면이 복잡해져서 뺐다가 하기도 하고 서사의 구성방식 찾기에 고전하다가 스스로 한계를 느껴 일단 붓을 놓았다”면서 혼란한 심정을 밝힌다.
<출몰무대>(2017)는 승강무대와 스크린이라는 연극적 장치로 다층적 공간을 구성해 극적인 서사를 이끌어내고 있다. 줄을 타고 올라가고 내려오고, 막 뒤로 사라지고, 화면 밖을 바라보고, 무릎을 꿇고 아래를 쳐다보는 작은 사람들을 배경으로 거대한 양복들이 화면을 장악했다. 작은 권력을 쥔 이들이 필요에 따라 거대하게 부풀려진 옷을 입고 그 안에 숨어 현실을 왜곡하고 외면하는 상황인 것일까. <사발면이 든 배낭>(2017)도 스크린이라는 설정으로 구성된 작품이지만, 여기서 스크린은 다시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사망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극을 떠올리게 하면서 그림을 바라보는 시선마저 숙연해진다.
  
2016년 여름 팟캐스트 ‘말하는 미술-노원희 편’ 준비모임에 자리를 함께해 노원희와 처음 얘기를 나눴다. 때로는 너무 무겁고 때로는 너무도 지리멸렬한 이야기들을 덤덤하게 전하는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지나온 여정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버스를 타고 쭉 뻗은 고속도로가 아니라 구불구불한 산길을 넘어가 평지에서 숨을 돌리고 다시 산길을 넘어가는 그 여인은 (세상의) 자식을, 어머니를, 남편을, 그리고 집과 살림살이를 걱정하고 있었을까. 40여 년을 그렇게 바쁘게 살고 밖을 보니 사건들이 너무도 많다. 펜을 들거나 붓을 들어 기억하고 기록하면 안될 일들이. 전시를 준비하며 작가와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그는 매번 눈시울을 적셨다. 가족을 회상하며, 제자를 떠올리며, 세상의 인생들을 기억하며. 단순한 연민은 아니었다. 그는 “작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생들을 크고 작게 흔드는 거대한 바탕, 판 구조를 생각하고, 우선적으로 인생을 찢고 인생을 무너뜨리는 폭력들에 대해 생각”하며 ‘세상의 인생들’을 그림으로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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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스페이스
 
2017 풀 프로덕션 《열,풍
 
○ 전시명: 《열,풍》
○ 작가: 조은지
○ 기획: 김미정
○ 그래픽 디자인: 강경탁(a-g-k.kr)
○ 공간 디자인: 신익균
○ 기간: 2017년 4월 27일(목) ~ 5월 21일(일)
○ 오프닝: 2017년 4월 27일(목) 오후6시
○ 장소: 아트 스페이스 풀
○ 관람시간: 10:00 ~ 18:00  (월요일 및 5월 9일 휴관)
○ 후원: 서울시, 서울문화재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살아냄’을 그리는 아슬아슬한 풍경      
            
김미정(아트 스페이스 풀 큐레이터)
 
 
조은지의 개인전 «열, 풍»은 작가의 초기 작품들을 떠올리게 한다. 복날의 개들을 위로하기 위한 ‹개 농장 콘서트›(2004), 개발과 자본의 논리 하에 사라질 수밖에 없는 지역들을 이야기하는 ‹밴드금성일식과 지율스님의 만남›(2004) 등,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거나 타의에 의해 사라져야 하는 부조리한 상황을 겪는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같이 목소리를 내주었던 지난 작품들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 등장하는 사회적, 역사적 배경의 의미와 역할이 더 커졌음에도 작가는 자신이 직접적으로 목소리를 내거나, 행동하는 것을 지양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발발한 학살과 1970년대 캄보디아 킬링필드라고 불린, 캄보디아 대학살 사건의 생존자들을 찾아가 인터뷰하고 영상으로 기록한다. 이는 전시장에서 영상, 드로잉, 사운드 인스톨레이션 등으로 구현된다.
 
2채널 영상 ‹수행하는 사람들›(2017)의 인터뷰이들은 작가의 질문에 따라 과거의 기억들을 꺼낸다. 누군가는 과거를 어느 정도 극복해낸 듯 보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렇지 않다. 고통스럽지만, 살아내야‘만’ 했던 순간들이 발화된다. 그러나 작가는 그들의 그 생생한 인터뷰들과 사연들을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표정, 손짓, 혹은 눈물 등을 비출 뿐이다.
 
그들은 죽음을 맞닥뜨린 동시에 생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움직였던 이들이다. 낙하하지 않기 위해 올라가야만 했던 이들이다. 그 기억이 발화되는 순간에 공감하고 감정을 담을 수는 있겠으나, 그것은 겪지 않는다면 영원히 알 수 없는 모르는 풍경이다.
 
 
움직임의 무게
 
죽는다는 것-잠자는 것-그뿐인가?
육신이 상속받은 피의 기억과
수천가지의 타고난 고통을 한 번의 귀찮은 칼질로 끝낼 뿐이라면,
그것은 칼이 열망하는
소박한 절망일 뿐이지 않은가.
 
‹햄릿›의 대사를 응용한 내레이션은 인터뷰이들의 삶을 압축하는 시처럼 다가온다. 이 내레이션과 함께 등장하는 마임이스트들의 움직임은 인터뷰와는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신체와 거기에 얽힌 고통을 이야기하는 내레이션은 날 것 같은 마임의 움직임과 밀접하게 맞닿는다.
 
작가는 언어로 발화되는 기억보다 신체의 움직임으로 새겨진 기억을 더 신뢰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생존자들의 기억이 제 3자의 신체의 움직임을 통해 확장되기를 기대한다. 때문에 작가는 신체의 기억을 마임이스트들의 움직임으로 구현하고자 한다. 마임이스트들에게 인터뷰를 보여주고 즉흥적 연기를 유도하는 것이다. 작가는 그 과정과 결과에 개입하지 않으며, 인터뷰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여 마임이스트들에게 전달하고, 해석을 맡긴다. 때문에 마임이스트들이 그 인터뷰를 보고 어떤 감정으로, 무엇을 표현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일부 동작과 표정을 통해 생존자들의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추측할 수는 있다.
 
그러나 당장 살 방법을 찾지 않으면 죽음 밖에 없었던 이들의 절박한 역사와 마임의 역동적인 움직임 사이에 묘한 간극이 발생한다. 생존의 절박함이 즉흥안무의 화려한 움직임으로 대변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생생하고 열정적인 몸짓과 생존자들의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은 분명 대비된다. 게다가 마임은 즉흥적이고 순간적이지만, 생존자들의 기억은 현재 진행형이다.
 
마임은 충실하게 인터뷰이들의 감정을 해석하고 재현하며, 그 과정에 참여하지만 대상과의 상호작용이 부재한 표현/재현의 결과로서의 마임은 의문을 만든다. 결국 마임의 역할은 신체를 통한 기억의 확장이라기 보다 오히려 그것의 재현 불가능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어쩌면 격정과 윤리의 판단 사이를 오가는 상황을 조성해 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또 평가할 것인지를 작가가 역으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아닌지 추측해 본다. 생존자들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살아낸다’는 의미가 가진 무게의 절실함뿐일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잠자는 것이 아니다.
 
 
숲의 그림자
 
복도형 전시장에 설치된 삼각형 형태의 벽을 지나면, ‹낙하하는 부활에 관한 감정적인 케이스2›(2017)를 만날 수 있다. 이 작품은 사운드 인스톨레이션으로, 자연의 평화로운 소리가 울리는 방이다. ‹수행하는 사람들›은 대상화된 신체와 그에 대한 응시를 보여주었다면 ‹낙하하는 부활에 관한 감정적인 케이스2›에서는 관객의 공감각적 경험을 유도한다.
 
반대편에는 숲의 풍경을 담은 영상 ‹낙하하는 부활에 관한 감정적인 케이스1›(2017)이 재생되고 있다. 모니터가 뒤집어져 있어 정확하게 그 이미지를 인지하기는 어렵지만, 사실 이 곳은 당시 학살이 자행되던 인도네시아의 숲으로, 피의 기억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는 공간이다.
 
그렇게 무거운 작품들을 지나 한 켠에는 작가가 4.16 참사를 마주하며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무기력함을 그려낸 드로잉들이 있다. 드로잉이라는 이 반복적인 행위는 자신의 무력함을 극복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작가가 ‘수행’한 흔적들이다. 삶을 상징하는 열과 바람을 만들어내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였을 작가의 몸짓을 상상해본다. 무언가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행위에 ‹수행하는 사람들›에 등장한 인터뷰이들의 이야기가 겹쳐진다. 이 드로잉 앞에서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나 삶으로 걸어나가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그들의 신체를 비로소 상상하게 된다. 물론 작가의 수행은 그에 비하면 턱없이 소극적이고 감상적이다. 그러나 ‘살아냄’이 누구에게도 녹록치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때문에 이 드로잉은 작가가 생각하는 ‘살아냄’의 태도를 가장 솔직하게 담은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작가가 전시장에 펼쳐놓은 이야기의 배경들은 결코 가볍지 않다. 역사적 배경이 무거운 탓도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생존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무심코 들었던 바람 소리가 피의 그림자가 되고, 마임이 발생시키는 열감에 도취한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게 되는 순간을 만날 때, 삶의 단편적인 순간들을 쉬이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고요한 숲의 그림자 안에서, 열과 바람의 무게가 자꾸만 무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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