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은 장기에 걸쳐 가변적인 형태와 매체로 확장되는 동시대 미술의 작업생산방식을 고려하여 프로덕션 과정에서 벌어지는 연구, 토론, 해외 레지던시 체류, 스크리닝, pdf 프리젠테이션, 글, 서적 발간, 온라인 대화 등 작업 소개 방식과 형태를 다양화 하고자 합니다.

풀은 자체적으로 주관하고 주최하는 인하우스 전시사업 외에 국내외 미술기관, 사회단체, 작가, 독립기획자, 학교 등과의 협업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공동기획 프로젝트, 해외 레지던시 진출, 왭을 통한 컨텐츠 공유, 연계사업 등 외부 진출, 연계사업을 다양하게 확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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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스페이스
 
2017 풀 프로덕션 《녹는 바다
 

○ 전시명: 녹는 바다

○ 작가: 김영은, 김지영, 임영주

○ 기획: 이성희

○ 그래픽 디자인: 강경탁(a-g-k.kr)

○ 공간디자인:  김형준

○ 사진:  홍철기

○ 기간: 2017년 10월 17일(화) ~ 11월 17일(금)

오프닝 리셉션: 2017년 10월 17일(화) 오후 6시

○ 장소: 아트 스페이스 풀

○ 관람시간: 10:00 ~ 18:00 (월요일 휴관)

○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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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스페이스
 
2017 풀 프로덕션 《정덕현 개인전: 조각모음
 

○ 전시명: 조각모음

○ 작가: 정덕현

○ 기획: 신지이

○ 그래픽 디자인: 강경탁(a-g-k.kr)

○ 사진: 안동일, 홍철기

○ 기간: 2017년 8월 25일(금) ~ 9월 24일(일)

오프닝 리셉션: 2017년 8월 25일(금) 오후 6시 

○ 장소: 아트 스페이스 풀

○ 관람시간: 10:00 ~ 18:00 (월요일 휴관)

○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본 전시의 오프닝 행사는 몰타맥주Cisk와 함께 합니다.

 
 
 
 
조각을 모으다
 
 
신지이(아트 스페이스 풀 큐레이터)
 
수많은 시간, 관계 그리고 다양한 존재방식들이 공존하고 충돌하면서 세상은 만들어진다. 이 명증한 그리고 상투적인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곧잘 성급하게 현재를 재단하고, 관습에 의존해 버리며 복잡다단한 질문들을 덮어버린다. 세상사가 피곤하고 고단해서?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가 이제는 어쩌면 게으르거나 오만한 이의, 모든 것을 그만 놓고 싶은 사람의 핑계처럼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열을 봐야 비로소 하나를 깨닫는 사람은 그럼 어떤 부류일까.
 
정덕현 개인전 «조각모음»에서 ‘조각’은 일종의 세계를 구성하는 ‘열’의 시각, 관점, 존재의 다양성을, ‘모음’은 그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작가의 태도를 이야기한다. 전시는 한 화면에 일견 관계없어 보이는 여러 사물을 배열한 ‹스틸 라이프› 시리즈와 여러 시점에서 바라본 하나의 사물을 기둥으로 세우고 또 펼쳐놓은 ‹다각기둥› 시리즈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점을 점유한 이번 작품들은 작가의 지난 개인전 «역사는 더 나쁘게 과거를 반복한다»(합정지구, 2015)에서 팽창하고 확산되는 ‘단일한 사물’-회색조 재봉틀이 열 종대를 지어 끝없이 펼쳐지거나(‹그림자›(2012)), 화면을 장악하며 거대한 기념비로 등장했던 것처럼(‹피에타›(2013))-들이 주로 등장했던 전작들에 비해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이다. 이번 전시에도 재봉틀이 등장하지만 과거 작업의 도상들과 함께 전체의 일부로 소환되어 주변부에 자리할 뿐이다(‹복기›(2016)).
 
사물, 관계의 속내
앞서 ‘조각’이 다양한 관점과 시각에 대한 이야기라 전제했지만, 정덕현의 그림을 처음 마주했을 때, 빛바랜 호분의 색조, 꺼끌한 종이의 질감 그리고 건조하게 묘사된 사물들에서 느껴지는 것은 우울함을, 냉소를 넘는 어떤 염세적인 시선이다. 콘센트는 콘센트로 끝없이 이어지고 바늘꽂이에 바늘이 꾹꾹 박혀있다. 비대해진 나사못이 화면을 무겁게 누른다(‹체증›(2016)). 탑차에 끝도 없이 들어가는 납작한 캔버스를 보고 있노라니 짐칸이 허기진 공룡의 검고 깊은 주둥이처럼 느껴졌다고 한다(‹공룡›(2017)). 캔버스 틀에 종이를 팽팽하게 당겨 걸고, 잠시 바르게 눕혀놓은, 아직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빈 화면이 시선을 끄는 ‹밝은 그림›(2016)의 설명이 무척이나 회의적이다. 평소 어두운 그림만 그린다며, 밝은 그림도 좀 그려보라는 부모님의 권유로 캔버스 앞에 섰는데 세상에 밝은 것이라고는 하얀 캔버스 밖에 없었다는 것이 작가의 말이다. ‹휴가›(2016)만큼 먹먹한 그림이 있을까. 밑동만 남겨진 채 잘린 나무 주위에 한때 이곳이 작업의 현장이었음을 암시하는 못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그 바닥을 빙 두르는 바짝 마른 검은 국화잎이 보인다. 벌목된 나무처럼 어쩌면 대한민국 노동자에게 휴가는 쉼이 아니라 끝일 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일상의 사물들을 매개로 하여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묵묵히 담아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버티고 있는 세상의 보편적 관계들에 불편한 속내를 드러낸다. 사다리 위, 탑처럼 쌓인 책 위로 또 나사와 붓이 바로 서있다. 그 끝에 마지막으로 지폐 몇 장이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는 ‹자식새끼›(2016)는 작가의 자조적인 자화상이다. 부모에게 자식이 마냥 기꺼운 존재로만 있을 수 있을까. 자식은 아마도 분명히 집에서 가장 가방끈이 길 것이다. 그래서인지 말은 번지르르, 벌어오는 돈을 보며 터지는 부모의 한숨이 들리는 듯하다. 소파를 앞에 두고도 앉기를 주저하며 불편하게 서 있는 누군가에게 ‹편하게 있어›(2017)라고 말하는 관계를 상상해보라. “내가 생각해서 해주는 말인데···”로 시작하는 유형의 대화들이 있다. 듣는 이에게 대화라기보단 결국엔 일방적인 ‹선생질›(2017)이 되어버리는 이 같은 일상의 미시적인 폭력 안에서 뱉지 못하고 삼켜버렸던 말들을 작가는 손가락 기호(?)로 유머러스하게 대신한다.
 
모순어법 또는 형용모순은 수식하고자 하는 명사가 본디 가지고 있는 원뜻을 다르게 해석하도록 유도하면서 보편적인 것에 의심을, 상투적인 것들을 곧장 파격한다. 정덕현의 작품에는 이미지를 수식하는 제목, 제목을 가시화하는 이미지가 서로 엇갈리면서 생기는 간극이 존재한다. 붉은 열을 맹렬히 내뿜고 있는 두 대의 난로가 서로 등을 지고 있는 작품에는 ‹대화›(2017)라는 제목을, 물이 가득 담긴 대야에 잠겨 있는 선인장에는 ‹사랑 듬뿍›(2017)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긴밀하게 서로를 보완해야 할 제목과 이미지는 오히려 상대를 배신하고 익숙한 기호들을 실소하도록 이끈다.
 
판단유보: 몸을 움직여 사유하기
작가의 이전 작품부터 신작에까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사물들이 있다. 화분, 못, 너트, 바늘, 재봉틀이 그것이다. 봉제공장이 즐비한 작가의 창신동 작업실 부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들로,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도구라는 점에서 노동의 소모품들이다. 최종의 결과물이 아닌 노동의 과정 속에만 존재하고 소비되는 도구들은 물질이기에 앞서 그것을 향해 이동하는 (노동자의) 몸, 그리고 행위(움직임)를 떠올린다. 사실 기계부품에서 인간사의 부침을, 노동하는 몸을 이끌어내는 것은 슬프게도 상투적이 되었다. 이를 낭만적으로 소비하지 않으려는 듯 작가는 가능한한 최대한 자세를 고쳐 잡고 손목에 더 힘을 주어 작업에 임하고 있다고 말한다. 여러 번 덧붙여 지층처럼 두터워진 종이 위에 마르지 않은 상태로 그리고 지우고 또 그리기를 반복하니 벌레같은 보풀들이 생겼다. 완성 직전에 칠하는 겔 미디엄을 결을 바꿔 붓질한 흔적도 그대로 남았다. 자신의 (노동하는) 몸과 움직임 또한 표면에 마치 증거처럼 투사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시도한 ‹다각기둥› 시리즈는 기둥 주위를 큰 걸음으로 걷고 까치발을 해야 전체를 다 볼 수 있다. 작품을 바라보는 이들의 몸 또한 자연스럽게 이끌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비판적 사실주의처럼 부조리한 현실을 소리 높여 성토하는 것도, 자본주의 리얼리즘처럼 대중화된 기호들을 적극 사용하는 것도 정덕현의 작품을 설명하는데 적절치 않아 보인다. 사물에 침잠해 있는 작가의 냉소, 모순, 자조, 회의의 시선은, 부러 지우지(떼어내지)않은 표면에 투사된 조심스러움, 머뭇거림, 반복과 같은 몸의 시간성, 움직임들과 한데 뒤섞여, 현실을 앞에 둔 작가의 적극적이며 동시에 유보적인 태도, 그 언저리 애매한 곳에 위치해 있다. 작품에 녹아있는 부정의 용법들은 그동안 일상처럼 익숙해진 혹은 관습이란 이름으로 용인되었던 사물의, 관계들의 미묘한 ‘다른’ 국면을 들추어 내지만, 안개처럼 내려앉은 뿌연 색조가, 시선에 덜컥 걸리는 보풀들이 작품을 바라보며 격앙되어 있던 사고의 작동을 잠시 지체시키는 역할을 해 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작가 스스로 ‘열’의 조각들을 감각하고 이해하고 ‘당장에’ 판단하는 것에서 얼마나 많은 오류가 있었는지 자문하며 넣어둔 쉼표라는 생각이 든다. “관찰자가 될까 봐 경계하고 프로파간다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나의 태도”(‹낙서›(2015))라 넌지시 던졌던 작가의 소회처럼 말이다.
 
“우리를 사랑하는 동안 그는 사랑하는 자신의 조상들을 혐오했노라”[1]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단편 「전사(戰士)와 포로에 관한 이야기」에 등장하는 룸바르디아의 전사 드록툴프트의 묘비에 쓰여있는 문장이다. 라베나를 침공하러 온 야만인 드록풀프트는 도리어 그 도시에 매료되어 라베나를 방어하다 죽은 영웅이자 반역자였다. 이 단편의 또 다른 주인공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원주민들에게 어릴적 납치된 요크셔 출신의 여인으로, 수십 년이 지난 뒤 피난처를 제공해주겠다는 어느 영국 여인의 제안이 있었지만 양의 목을 따 뜨거운 피를 마시는, 가축들의 똥으로 불을 지피는 사막의 방식을 선택한다. 양극단에 서있는 둘의 운명을 “어떤 비밀스러운 충격, 이성보다 더 심원한 어떤 충격”[2]에 포로가 되어 순종했다고 소설은 적는다. 그리고는 신에게 있어 동전의 양면이란 결국엔 동일한 것이기에 그 둘의 이야기가 실은 하나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며 끝을 맺는다.
 
21세기의 우리는 운명을 선회시키는 이 같은 충격 속에 빠질 일이 별로 없다. 그러니 지금과는 ‘다른 내’가 되는 것을 상상하는 것도, 또 다른 ‘너’를 받아들이는 것도 때때로 버거워한다. 전사와 포로에게 닥친 운명 내지는 선택을 이해하는 것보단 그들을 동정하는 편이 쉬울 것이다. 작가는 사물들을 통해 대립하는 관계와 상황을 보여주지만 어느 한쪽에만 자신을 위치시키지 않는다. 그 둘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살아가는 모두의 이야기를 하나로 이으며, 양극단 모두에 서있는 하나의 나를 관객들도 바라봐 주기를 기대하는 것 같다.
 
정덕현은 작가노트에서 “내가 선택한 사물들 혹은 나를 선택한 사물들은 나와 동료들의 초상이 되었고, 약자들이 되었으며, 사회의 시스템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자신과 주변의 이야기들이기에 섣불리 재단하지 않고 이리저리 둘러보며, 온몸으로 천천히 반복해서 의심하고 탐구한다. 세 그릇의 밥공기와 공중에 걸린 무지갯빛 행성모형 장난감, 동성애자 군인A대위에게 유죄를 선고한 사건 때 그린 그림의 제목 ‹같이 먹자›(2017)라는 말이 어쩌면 작가가 가장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1]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전사(戰士)와 포로에 관한 이야기」, 『알렙』, 황벽하 역, 민음사, 1996, p.67
[2]위의 책,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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