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은 장기에 걸쳐 가변적인 형태와 매체로 확장되는 동시대 미술의 작업생산방식을 고려하여 프로덕션 과정에서 벌어지는 연구, 토론, 해외 레지던시 체류, 스크리닝, pdf 프리젠테이션, 글, 서적 발간, 온라인 대화 등 작업 소개 방식과 형태를 다양화 하고자 합니다.

풀은 자체적으로 주관하고 주최하는 인하우스 전시사업 외에 국내외 미술기관, 사회단체, 작가, 독립기획자, 학교 등과의 협업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공동기획 프로젝트, 해외 레지던시 진출, 왭을 통한 컨텐츠 공유, 연계사업 등 외부 진출, 연계사업을 다양하게 확장합니다.

CURRENT

○ 전시명: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 작가: 무진형제
○ 기획: 신지이
○ 그래픽디자인: 강경탁(a-g-k.kr)
○ 공간디자인: 김형준
○ 기간: 2019년 10월 31일(목)~12월 1일(일)
○ 오프닝: 2019년 10월 31일(목) 오후 6시
○ 장소: 아트 스페이스 풀
○ 관람시간: 11:00 ~18:00 (매주 월요일 휴관)
○ 후원: 서울문화재단
*주차가 불가하니 대중교통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지이(아트 스페이스 풀 큐레이터)

무진형제는 스스로를 ‘발견하는 자’로 부른다. 발견은 목적지 없는 탐험이자 점유 없는 탐구의 과정이다. 어딘가를 유영하다가 이전에는 몰랐던 것, 생경한 것을 ‘찾는’ 행위를 작업의 방법론으로 삼고, 무엇을 보게 될지 미리 방향을 설정하지 않은 채 일단은 떠났으리라. 그렇게 그들이 경유지로 삼았던 것은 고전 텍스트나 설화부터 애니메이션, 열화상 카메라에 이르기까지 꽤나 큰 시공과 다양한 양태를 아우르고 있어 그들의 뒤를 좇다 보면 거슬러 올라가야 할 때도 있고 길잡이가 아쉬울 때도 있다. 돌이켜보면 무진형제가 재현하는 세계 안에는 역치를 넘는 어떤 자극이나 심리적인 동요를 일으킬만한 심대한 사건들은 없었다. 대신 줄넘기를 하는 소년, 새벽시장, 좋은 세상을 바라는 마음처럼 평범하고 차분하게 삶을 살아‘내어’ 온 주변과 시간들에 대해서 말해왔을 뿐이다. 반복되고 있기 때문에 굳이 되새기려 하지 않았던, 심심하고도 편재되어 있는 일상의 한 단편. 그래서 그 장면들이 특별히 어디이며 누구의 이야기인지 세세하게 따져 묻는 것이 소모적일 때도 있다. 무진형제는 주변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에둘러 낯선 곳을 헤맨다. 혼종적인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장면은 일상이지만 뜻밖의 모습을 하고 있고 기이하기까지 한 감각을 유발한다. 그리고 이 ‘발견된’ 주변은 어디의 누구라는 구체적인 좌표보다 앞서 있었던, 일상이 주는 익숙함에 가려져 있던, ‘왜’라는 보다 낮은 질문을 던진다. 어째서, 무슨 까닭으로 그런 모양을 갖게 되었을까. 전시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에서도 셋, 혹은 그 이상의 시간과 공간을 역류하고 통과하여 사람과 그를 감싸고 있는 공간, ‘집’을 펼쳐 보인다. 그것이 갖는 내밀함을 언어화하면 할수록 온전히 전달되지 못함에, 시시각각 낡아버리는 감정에 조금 애틋해지는 곳. 그곳에 목적 없이 일단 발을 내딛고 헤매다 아주 이상한 모양을 발견했다.
 
첫 번째 영상은 고령의 노인과 그만큼이나 긴 세월을 품었을 그의 집을 퍽 정직하게 살핀다. 노인의 성긴 머리카락이 새벽녘 안개와 여명 때문에 잠시 사라졌다가 나타난다. 밥을 먹고 통화를 하고 어딘가로 잠시 나서기도 한다. 우편물 봉투의 끄트머리를 뜯어내어 손톱에 묻은 얼룩을 닦는 것 정도가 예상 밖의 행위일 정도로 그의 하루는 적적하고 고요하게 흐른다. 전시장 가장 안쪽에 있는 두 번째 영상은 깊은 밤 산속, 무언가를 깎아 내려가는 인물을 보여준다. 그리고 화면은 아이스 링크장의 바닥을 미끄러지며 긁어 대다가 서서히 발 딛고 있는 땅을, 도시를, 그 너머 아득한 어딘가를 커다랗게 순회한다. 그리고 집에 ‘기대하는’ 말, 집에 ‘깃든’ 말을 고민한다. 하옥(夏屋), 안택(安宅), 아문(我門)은 모두 집을 뜻하나 집에 대한 각각 다른 척도를 드러낸다. 오래전 집은 자식의 자손까지 품을 만큼 컸어야 했고, 누군가에게 집은 끝끝내 마음을 편히 놓지 못하는 곳이었으며, 지금은 ‘내 것’에 대한 열망이 허망하게 접히는 곳이 되었다. 살 거(居)와 살 주(住)가 합쳐진 거주를 보자. 이는 ‘살다’를 뜻하지만 낱말을 하나씩 펼쳐보면 유한성에 대한 불안이 숨겨져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주(住)는 인간(人)이 방 한가운데 촛대(主)를 들고 있는 형상인데, 촛불이 꺼지면 동시에 주인공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두 개의 영상은 같은 제목을 갖고 있고 1과 2라는 숫자로만 나뉜다. 동일한 명제를 달고 있지만 어떻게 보아도 너무 다른 세계이다. 하나는 시선이 다르다. 지근거리에서 인물을, 수평에서 풍경을 바라보던 시선이 다음 영상에서는 부감으로 바닥의 무리들을 조망하다가 한없이 위로 솟구쳐 버린다. 둘은 목소리. 영상 전반에 깔리는 소음에 가까운 중얼거림에서 다음에는 화자가 있고 또렷하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셋은 흐름. 그는 더 이상 멀리 가고자 하는 충동이 없어 보였고, 다른 이들은 이제 멈추는 방법을 배워야 할 차례 같다. 두 영상은 서로와의 간극을, 장면과 장면 사이의 균열을 숨기지 않는다. 
 
사실, 시작은 낡은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할아버지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그렇게 그의 집과 일상을 가까이에서 기록하기 시작했고, 유일하게 놀랄 만큼 큰 소리가 나올 때가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잠에 빠져들었을 때였다. 처음의 영상에서 꿈인지 생시인 헷갈리는 장면들이 틈입되어 있는 것이 떠오를 것이다. 인위적인 색으로 물들고 있는 고요한 풍경, 엇박자를 내며 나지막이 신경을 긁는 잠꼬대,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박쥐처럼. 꿈에서 할아버지는 무엇을 보고 있을까. 소환된 과거일까, 변질된 기억일까, 뒤섞인 상상일까. 육체의 한계를 조금은 잊었나 보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사상과 경험뿐만 아니라 몽상도 인간적인 가치를 확정시킨다고 말한다. 그리고 집은 그러한 몽상과 몽상하는 이를 보호하며 꿈꾸게 한다. 소중하지만 잊고 있었던 오래전 기억과 추억이 집을 매개로 하여 불현듯 꿈속에서 되살아나는 것을 한 번쯤 경험해 봤을 것이다. 한때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으나 지금은 닫혀 있는 그의 창고가 꿈에서는 여전히 농기구와 곡식으로 가득할지 모를 일이다.
 
할아버지의 잠꼬대는 다른 시간과 공간 사이를 유영하게 만들었고, 집의 모양과 말을 곱씹게 하였으며, 아버지와 동세대들을 돌아보게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전시가 그들의, 아니 우리에게 집이 무엇이었고 무엇이어야 하는지 명시하지 않는다. 다만 그렇게 만들어진 혼재된 장면들과 뒤섞인 감각 사이를 좇다 보면 마지막에 이르러 또렷하게 잔상 하나를 남기는데, 등을 맞대고 어슷하게 선을 그어가다 비로소 하나로 맞물리는 원, 원에 대한 감각이 그것이다. 원은 점이자 면이고, 기반이 갖고 있는 최소이자 최대의 모양이다. 무수히 많은 작은 도약들이 원 위에서 번식하고 번식한다. 할아버지의 집에 여전히 생생한 떨림이 존재하는 것처럼, 과거의 소환이자 연결로서의 꿈은 시간 사이의, 세대 사이의 틈을 메우고 또 둥글게 감싼다. 집이 늘 그랬던 것처럼. 제목은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마지막 구절을 차용했다. 노인의 꿈에 등장하는 사자가 허망한 현실에도 놓지 못한 의지의 발현인 것처럼, 전시는 3대에 걸쳐 변해가고 있는 거주의 모양을 살피며, 삶이 무엇으로 어떻게 흘러가야 하는지 그 방향성을 묻는다. 
 
 

FORTHCO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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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

 
○ 전시명: 기체 액체 고체
○ 작가: 여다함
○ 기획: 안소현
○ 퍼포머: 공영선
○ 음악: 날씨
○ 영상 촬영/편집: 최윤석
○ 사진: 박해욱
○ 공간디자인: 양재형
○ 설치 도움: 김형준
○ 그래픽디자인: 들토끼들
○ 도움 주신 분들: 권병준, 여혜진, 최경주
○ 기간: 2019년 9월 17일(화) ~ 10월 20일(일)
○ 오프닝: 2019년 9월 17일(화) 오후 6시
○ 장소: 아트 스페이스 풀
○ 관람시간: 11:00~18:00 (매주 월요일 휴관)
○ 후원: 서울문화재단
*주차가 불가하니 대중교통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말이 빈 자리의 도시 산책 연습
 
안소현(아트 스페이스 풀 디렉터)
 
 
 
여다함이 만든 것 앞에서는 종종 말이 빈다. 그것이 난해해서라기보다는 자명해서 숨은 의미를 캐내거나 개념을 갖다 붙이는 것이 공허하게 느껴진다. 물질의 자명함은 때로 말을 부대끼게 한다. 개념을 향한 의지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전시 제목도 큰 말을 붙이려는 충동을 일찌감치 차단하는 듯 하다. 그래서 그의 작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추상적인 말로 문을 열려 하는 습관을 버리는 편이 낫다. 말로 다가가는 습관은 생각보다 질겨서 버리려면 반복적인 연습이 필요한데, 이 글도 그런 연습의 하나였으면 한다. 물론 말 대신 감각을 채워넣는 과정을 도리 없이 말로 풀어야 하는 이 상황이 얄궂기는 하다.
 
이 전시에는 프롤로그가 있다. 전시장 가장 큰 벽에 검은 바탕 위에 흰 선이 구불구불 지나가는 이미지가 걸려 있는데 제목은 <발밑>(2019)이다. 다가가 보면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갈라 가르마를 탄 정수리를 확대한 사진들이다. 신체를 확대해서 보는 일은 그 자체로 기묘할 수 밖에 없지만, 그보다 더 이상한 것은 머리 꼭대기에 붙은 ‘발밑'이라는 제목이다. 몸을 모로 뉘여 정수리를 밟고 선다고 상상해보자. 머리의 주인은 자신의 정수리 능선을 따라 난 가르마 오솔길을 볼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전시를 함으로써 머리의 주인도, 우리도 그 길을 보게 된다. 여다함은 그렇게 보지 못했던 길을 보고 보여주기 위해 전시를 한다. 
 
이제 뜨개질에서부터 연습을 시작해보자. 익숙한 방식대로라면 눈은 맨먼저 뜨개질의 결과물이 무엇을 닮았는지 찾을 것이다. 그 닮음이 정해진 상징으로 안내해줄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것은 산맥을 닮았으면서 곰팡이가 생각나게 하고(<무제>), 다른 것은 종유석 같기도 하지만 매달린 죽은 짐승처럼 보이기도 한다(<60촉 바디 랭귀지>). 또 다른 것은 <향로>라는 정직한 이름을 갖고 있고 연기도 내뿜지만 어쩐지 자꾸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내 여다함에게서 닮음은 효과적인 출발점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반면 뜨개질을 하는 동작과 과정은 이름을 붙이기는 쉽지 않지만 일관되다. 아무리 크고 넓은 면도 모두 하나의 코에서 시작하지만 코는 실을 당기기만 해도 사라져버린다. 모든 코는 실의 다른 위치에서 시작하며 아무도 완벽하게 같은 두 개의 코를 만들 수 없다. 실과 뜨는 방법이 같아도 결과가 같지 않다. 내가 시작한 것을 멈추지 않고도 다른 사람이 시작한 것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뜨개질은 동일성의 허무한 상실 또는 느슨한 동일성의 미덕을 갖고 있다. 게다가 뜨개질을 잘 하려면 말의 명령보다는 신경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그런 사실은 여럿이 대화를 나누며 뜨개질을 해보면 더 분명해진다. 여다함은 누군가 “뜨개질은 원래 혼자 하는 게 아니야”라고 한 말에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다고 했는데, 같이 할 때야말로 뜨개질은 의식적 궤도에서 벗어나 무의식적 신경의 궤도로 진입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렇게 뜨개실이 피어나고 자라나서 사라지는 과정에 주목하는 연습을 한다면, 그것이 ‘결과적으로' 고드름, 종유석, 향로 등을 닮은 것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고드름과 종유석은 액체와 고체가 구분되지 않는 상태로 자라고 제 몸이 아니었던 것과 만나 다시 하나가 되기도 한다(여기서 우리는 자기계발서 식의 교훈에 빠지지 않는 연습도 해야 한다). 우리는 처마밑과 동굴 속에서 벌어지는 이 생성을 드물거나 신비롭다고 하지만, 그렇게 느끼는 것은 우리가 고정된 말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흐르는 것을 흐르는 채로, 변하는 것을 변하는 채로 사유하지 못하게 하는 말의 구속은 참으로 거추장스러운데, 느슨한 동일성을 가진 존재들은 그렇게 말이 사유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래서 뜨개실이 향로로 자라나는 것과 그 향로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은 굳이 구분해서 말을 더하지 않아도 되는 자연스러운 생성이다.
 
다음으로 연습할 것은 부서짐의 감각이다. 여다함은 신경의 명령과 마찬가지로 잠의 경험을 기록하고 싶어하지만 그것은 당연히 온전한 언어를 얻기 힘든 것이다. 잠의 경험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잠을 깨는 순간 순식간에 부서져 버린다. 간혹 몇 마디를 남기지만 그 말들조차 규범의 언어에 의해 소통의 밖으로 밀려나 부서져 버린다. 그래서 작가에게 잠은 죽음의 연습이다. 그 경험을 그나마 가장 가까이서 밖으로 기록하는 것은 이불이다. 이불은 자는 동안의 몸의 움직임을 들썩거림, 뒤척거림, 몸부림의 물결로 만든다. 하지만 그 물결도 계속 부서지며 자고 일어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는 매한가지다. 이불이 “내일 부서질 무덤'인 것은 그 때문이다. 여다함은 초현실주의자들처럼 무의식의 세계를 호기롭게 시각화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라짐을 관찰한다. 그가 말하는 무의식은 라깡이 말하듯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기는 커녕, 언어에 다다르지 못할 만큼 조금씩 밀려왔다 밀려가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여다함이 말하는 죽음에는 어떠한 비장감도 없다. 잠이 죽음과 엮여서 거창해진다기보다는 죽음이 잠이라는 체험 학습을 통해 친근해진다. 그래서 전시된 <내일 부서지는 무덤>(2019)의 이불은 보드랍고 폭신하고 홑청의 파도 무늬는 당장 끌어안고 싶게 다정하다. 동명의 공연에서는 퍼포머가 장소를 가득 메운 커다랗고 포근한 누비 이불을 관객들과 나눠덮는다. 잠은 그래서 날마다 한 코씩 떴다 풀어버리는 죽음이다. 우리는 그냥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뜨개질을 할 때처럼 우리가 언어화 할 수 없는 죽음의 시간들을 조금씩 떠본다. 그러다보면 어느날 목에 턱하니 죽음이 둘러질 것이다.
 
또 다른 연습은 ‘구멍'에 관한 것이다. 퍼포먼스 <내일 부서지는 무덤>과 영상 <경>(2019)에는 사각의 거울을 들고 천천히 움직이는 퍼포머가 나온다. 거울은 퍼포머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퍼포머가 있는 주변 환경을 담거나 팔과 다리 등 신체의 일부분만을 복제한다. 그래서 그는 완전히 없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그냥 있을 때보다 좀 더 사라져 보인다. 그는 단단한 껍질을 가진 온전한 신체가 아니라 완전히 규정되지 않은 채로 일단 거기 있는 신체, 때로는 ‘하나'라고 부를 수도 없는 ‘부분'이나 ‘여러 부분들'처럼 느껴지는 괴물이다. 따라서 여다함의 거울은 눈을 똑바로 뜨고 거울을 마주보며 ‘나는 저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확인하는 자아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세상의 구멍이 되는, 굳이 이름하자면 내 안의 ‘비’자아를 위한 공간이다. 거울-구멍은 그렇게 세상을 다층으로 만들어 다른 깊이에서 바라보게 만드는 동시에 부분적으로만 존재하는 것들에 의해 지탱된다. 그 느리고 뒤뚱거리는 움직임이 묘하게 애틋한 정서를 자아내는 것은 아마도 우리가 세상을 지탱한다고 믿었던 것들이 그런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뜨개실도, 이불도, 거울도 여전히 익숙하고 평범하다. 여다함은 그 사물들이 대단한 진리의 담지자라고 외치지 않는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사람들이 이름만 붙여놓고 만족한, 너무 쉽게 알고 있다고 단정한 것들이 여전히 있다. 여다함이 만들어놓은 것에서 그렇게 동일성을 허무하게 상실한 것, 순식간에 부서져버리는 것, 사라지고 부분으로만 지탱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감각하는 법을 연습하다보면, 우리는 번잡한 도시에 적합하게 산책하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상품이 되어버린 명상처럼 완벽히 고요하고 인적이 드문 자연 같은 것은 굳이 필요 없다. 퍼포먼스를 기록한 영상 <과테말라 5000>(2017)에서 볼 수 있듯이 차와 사람이 넘쳐나는 도시에 적합한 산책이란 도시의 효용과 관계 없는 움직임들을 장려하는 것이다. 이 공연은 2015년부터 <매우 만족 만족 보통 불만족 매우 불만족>이나 <별똥별 체조>에서 보여주었던 ‘얼음 풍선’(헬륨 가스 풍선에 얼음을 매단 것으로 작가는 ‘갈등을 구조화한 장치’라고 부른다)에 청각적 요소를 더한 것이다. 서로 반대방향으로 당기는 얼음과 풍선에 사운드 센서를 더해 그들 사이의 긴장이 움직임과 소리로 드러나게 하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길거리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며 부유하는 얼음 풍선은 도시의 피부를 매만지는 물결이 된다. 지난 해 ‘보안여관'에서 한 퍼포먼스 <객지 여덟 밤>에서는 관객들을 통의동 일대를 걷는 밤산책에 초대해서 그림자로 쓴 꿈 속 이야기를 전해주고, 관객으로 하여금 이불을 덮고 누워 여러가지 소리를 듣고 소리의 진동을 느끼게 하였다. 낯선 잠자리에서 이불을 덮고 듣는 낯선 소리로 인해 관객들은 도시에서 남의 꿈을 훔쳐 들은 것 같은 두근거림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도시의 벽면을 뒤덮은 전단지의 숲에서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남은 흔적 이미지들은 베어진 나무 그루터기처럼 시선을 쉬어가게 만든다(<벌목꾼-어흥>(2019)). 여다함의 미덕은 마디를 만들다 놓친 것들, 이름을 붙이다 잊은 것들을 요란한 초월 동작 없이 이야기해준다는 것이다. 그의 작업 앞에서 연습을 반복할 수록 우리는 여기를 벗어나 다른 세계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메마른 각질로 가득한 도시를 찬찬히 다시 더듬는 감각을 익히게 된다. 늘 보던 것들로 지금 이곳을 달리 보게 하는 것, 예술이 말에 짓눌려 종종 잊은 그것, 도시 산책자가 비로소 깨워 준 대단하지 않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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