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은 장기에 걸쳐 가변적인 형태와 매체로 확장되는 동시대 미술의 작업생산방식을 고려하여 프로덕션 과정에서 벌어지는 연구, 토론, 해외 레지던시 체류, 스크리닝, pdf 프리젠테이션, 글, 서적 발간, 온라인 대화 등 작업 소개 방식과 형태를 다양화 하고자 합니다.

풀은 자체적으로 주관하고 주최하는 인하우스 전시사업 외에 국내외 미술기관, 사회단체, 작가, 독립기획자, 학교 등과의 협업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공동기획 프로젝트, 해외 레지던시 진출, 왭을 통한 컨텐츠 공유, 연계사업 등 외부 진출, 연계사업을 다양하게 확장합니다.

CURRENT

*POOLAP 프로그램과 전시는 작가 김정헌 선생님의 후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 전시명: 이제 침대를 망가뜨려 볼까
○ 작가: 김도연, 김태연, 송세진, 이지현
○ 기획: 김선옥
○ 그래픽디자인: 강경탁(a-g-k.kr)
○ 공간디자인: 김형준
○ 기간: 2019년 12월 12일(목) ~ 2020년 1월 19일(일)
○ 오프닝: 2019년 12월 12일(목) 오후 6시
○ 장소: 아트 스페이스 풀
○ 관람시간: 11:00-18:00 (매주 월요일 휴관, 12월 25일, 1월 1일 휴관)
○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차가 불가하니 대중교통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를 드러내는 것: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

 
김선옥(아트 스페이스 풀 큐레이터)
 
 
자꾸 힘이 들어갔다. 어깨와 팔, 키보드를 누르는 손가락에 나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얄팍한 개념과 과장된 수사들로 그들의 작업을 한 데 묶어 치장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주제 기획전이 아니라고 스스로 거리를 두면서도, 그들의 몸집보다 크고 거대한 옷에 그들을 가두고 나도 모르게 그들의 작업을 하나의 기준에 끼워 맞추고 있었다. (프로크루스테스처럼) 내 멋대로 그들의 작업을 재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풀랩’의 동력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각자의 다른 언어들이 한자리에 만나 세계를 다시 바라보는 과정인데, 나는 오만하게도 그것을 벌써 잊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처음 만나 인터뷰를 했던 6월의 그 날로 돌아가 보기로 했다. 올해 ‘풀랩’에 지원한 작가들은 유난히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한 경우가 많았고, 매체와 형식에 대한 고민도 깊었다. 그들은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려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전달하기 위한 자신만의 언어를 세심하게 고르는 중이었다. 30분 안팎의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인터뷰 시간 동안 그들이 조심스럽게 꺼내 놓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최종 선정된 작가들과 만나 세미나를 진행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가끔 뭉클한 순간들이 많았다. 비록 동일한 이유는 아닐지라도 나는 그들과 같은 고민의 궤도를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세계를 보는 나의 시선은 많이 바뀌었다. 밖으로만 돌던 관심이 이제는 점차 내 안을 향하기 시작했고, 뒤늦게 작은 세계를 천천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드러내는 것들에 서툴지만 더욱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기로 했다.
 
* * *
 
《이제 침대를 망가뜨려 볼까》에 참여하는4인의 작가들(김도연, 김태연, 송세진, 이지현)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조심스럽지만, 대담하게 들려준다. 이들의 작업은 미시적 시선을 통해서만 보이는 일상에 숨겨진 구조를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그 작은 이야기들을 함께 들어보려 한다.
 
김도연은 무의식의 세계를 구체적인 형상들로 기록하는데, 그 모든 기록은 몸의 감각에 의존한다. 그에게 그리는 행위는 형태가 분명치 않은 경험의 기록이자, 그것을 기억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흩어져 있던 이미지의 잔상들을 하나로 모은 그의 이야기는 우연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꼭 그릴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행위에 가깝다. 그것들은 전체로서 서사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분절된 이미지들의 집합체이다. 작가는 밑 작업을 생략한 채 바로 그리기 시작함으로써, 재료를 화면에 빠르게 안착시키면서 화면과 내밀하고 신체적인 관계를 만들어낸다. 마치 그의 몸이 기억하는 세계처럼. 천에 그릴 때의 악력은 작가의 흔적을 빛에 따라 다르게 드러낸다. (<어둠이 말하게 하라>) 그림의 표면 너머로 더 깊숙이 들어가기 위해 작가는 기름의 흔적을 남길 곳을 세심하게 고른다. 절지된 장지 위에 마치 ‘낙서’ 같은 형상들을 새기는 것은 과거를 기록하기 위함이며, 그에게 과거는 대상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감각할 수만 있는 빛과 닮았다. (<물과 빛 그리고 구름 속에 절지된 화난영모>) 기름이 한지에 엉겨 붙은 덩어리는 서서히 갈변하며 시공간의 흔적을 남길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그것을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길을 지칭하는 ‘길베’라 부르기로 한다. (<짊어지고 쫓아가는 길베>)
 
김태연은 불완전한 제도 안에서 작업을 지속하기 위한 조건에서 출발한다. 그는 작업하기 위해 필요한 물리적 환경을 스스로 제시하며 현실적 제약에 순응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그에게 도구는 기능적 쓰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계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형태가 된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지지대가 겹쳐진 가변크기의 기둥<가능의 구조>는 공간을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는 구조물로 다른 구조물을 떠받치며 보조했던 역할에서 벗어나 비로소 스스로 공간을 주체적으로 점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줄자는 물리적인 길이를 재는 도구적 기능을 소거하고, 형태를 지닌 가느다란 좌대 위의 조각이 되었다. (<뭐든 춤>) 형태가 몸을 갖기 위해 골격에 살을 붙여 물성을 두르고 단단해지는 과정은 김태연이 미술을 통해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방식과 흡사하다. 어찌 보면 고집스럽지만, 조심스럽고, 유난스럽지 않은 이 움직임은 ‘조각’을 손에서 놓지 않는 작가와 닮았다. 그래서, 그에게 조각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작은 창구일 것이다.
 
송세진은 인종, 젠더, 이념 등으로 분열된 세계를 미술의 언어를 통해 구조를 드러내고 해체하고 재구성하며 그 안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찾으려 한다. 그의 이야기는 대체로 3인칭 시점에서 전개되는데, 그것은 자신을 객관화하고 또 타자화하면서 자신과 거리를 두기 위함이다. 유리 매체를 전공하면서 경험한 ‘블로잉’(Blowing)이라는 유리 제작 방식에 뿌리 깊게 남은 ‘성 역할’(gender role)에 의문을 제기하고, 남성 중심적인 권력 구도에 저항하기 위해 그는 ‘신격화’된 유리의 숨을 빼 버리고 탑을 쌓았다가 무너뜨린다. (<Inhale>) 드랙퀸 ‘RuPaul’의 립싱크 퍼포먼스를 차용한<LIP-SYNC For Your Life>는 트럼프의 연설 장면, 마틴 루터 킹의 연설문, 그리고 박근혜의 탄핵 집회 장면을 오버랩하여 정체성이라는 개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서로 다른 신념과 가치관을 가진 이들이 동시에 ‘국가’와 ‘희망’을 반복적으로 말하는 장면은 모순적이지만 지극히 현실적이다. 송세진의 작업이 보여주는 것은 소수의 나약함이 아닌, 기존의 질서가 무너질 때 소수가 아닌 자들이 느끼게 되는 ‘불편함’이며 권력을 해체하는 것이다. 마치 유리 조형물에 숨이 빠져 외피만으로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됐을 때, 비로소 그 오브제가 ‘다르게’ 읽히는 것처럼.
 
이지현의 작업 태도가 변한 것은 사회적 죽음(세월호 사건)과 개인적 죽음(자살한 이웃)을 목격한 이후라고 한다. 회화 작가로서 재현을 항상 마주할 수밖에 없는 그에게 구상적 재현의 실패는 오히려 추상적인 ‘감정’에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지현의 그림에서 재현된 여성은 자신의 감정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해방된 존재들이다. 몸을 뒤로 훌쩍 젖히고 목젖과 치아가 다 드러나도록 활짝 웃는 여성들의 표정은 특히 아시아권 여성이 재현되는 전형적인 방식을 빗겨 나간다. 그의 작업은 2018년 낙태가 합법화되었을 때 기뻐하는 아일랜드 여성들은 담은 한 보도사진에서 비롯된 것인데, 그들은 기쁨의 환희를 넘어 거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표정을 짓고 있다. 그들은 결코 손으로 입을 가리거나 입가에 미소만 띤 채 ‘얌전히’ 웃지 않는다. (<우악스럽게 웃기>) 그래서, 이지현의 그림은 소위 ‘여성스러운 연약함’ 같은 클리셰로 여성성을 재현해온 관성적인 방식에 저항하며, 대상이 아닌 주체로서의 여성성을 드러낸다. 그의 그림은 대상을 반복적으로 재현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최근 들어 더욱 과감한 색면과 젠더의 구분이 모호해진 형상을 보여주며, 표면은 평면성을 거부하는 몸짓을 드러낸다. (<투명한 얼룩>) 구상에서 추상, 혹은 평면에서 입체를 넘나들면서 그가 찾아내려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해방’시키는 회화의 힘일 것이다.
 
* * *
 
춤을 출 인간은 죽게 될 것이다-아름다움을 모조리 실행하기로 결심하고, 그 어떤 것이든 해낼 수 있을 때. 네가 등장하면 창백함-아니다, 나는 공포가 아니라, 그 반대, 그러니까 그 무엇에도 굴복하지 않을 어떤 대담함에 대해 말하려 한다-어떤 창백함이 너를 뒤덮어버릴 것이다. […] 그 무엇도 더 이상 너를 바닥에 묶어 놓지 않은 그런 상태에서 너는 떨어지지 않고 춤출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외줄 위로 등장하기 전에 죽을 수 있게, 그리고 시체 하나가 외줄 위에서 춤을 추게 신경 써야 한다.”[1](장 주네(Jean Genet), 「외줄타기 곡예사」 중)
 
얼마 전 어떤 이가 신체를 갑자기 자유롭게 쓰지 못하게 된 순간 “파란빛이 울렁거리는” 느낌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작업에서 그 빛을 좇고 있다 했다. 대화가 끝난 후에도 이 말이 꽤 오랫동안 내 입안에서, 머릿속에서 맴돌았는데, 고통의 경험을 저리 비유한 그의 감각보다, 저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편하게 말하게 되기까지 그가 혼자 겪었을 지독한 시간이 어렴풋이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미술은 각자의 체화된 세계가 외부로 드러날 수 있는, 어둠 속에서 작은 신호를 보내는 그런 빛의 울렁임이 아닐까. 그래서, 이 위태롭고 치열한 일은 설사 타인의 이야기일지라도, 결국 자신을 대면하는 과정일 것이다. 장 주네(Jean Genet)가 아슬아슬한 외줄을 타는 곡예사의 고독을 위로하고, 사회의 음지에서 웅크리고 있을 약자들의 언어를 기꺼이 대변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넌지시 들려준 것처럼 말이다.
 
이제 막 먼 길을 떠난4인의 작가들은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들은 앞으로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거나, 뚜렷한 행선지를 정해두지 않은 채로 오랫동안 유영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그들의 긴 여정 중 짧은 단막을 보여주는 자리에 불과하다. 그들은 다시 숨을 고르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계속 써 내려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제시한 작은 실마리를 통해 다음 장의 이야기를 추측하고 기대하면서 그들이 가고 있는 방향을 짐작할 것이다. 가끔은 그 길 가까이 수다를 청하여 말동무가 되기도, 때로는 먼 곳에서 진득하게 그들의 안부를 기다릴 것이다. 비록 각자의 종착지가 다를지라도, 긴 여정의 중간 즈음에서 우리는 그렇게 다시 서로의 동행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우연히’ 이 자리에 다 같이 모인 것처럼.
 
 


[1]장 주네, 『사형을 언도받은 자/외줄타기 곡예사』, 조재룡 역, 워크룸프레스, 2015, pp. 134-135. 

FORTHCOMING

해당 게시글이 없습니다.

PAST

○ 전시명: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 작가: 무진형제
○ 기획: 신지이
○ 그래픽디자인: 강경탁(a-g-k.kr)
○ 공간디자인: 김형준
○ 기간: 2019년 10월 31일(목)~12월 1일(일)
○ 오프닝: 2019년 10월 31일(목) 오후 6시
○ 장소: 아트 스페이스 풀
○ 관람시간: 11:00 ~18:00 (매주 월요일 휴관)
○ 후원: 서울문화재단
*주차가 불가하니 대중교통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지이(아트 스페이스 풀 큐레이터)

무진형제는 스스로를 ‘발견하는 자’로 부른다. 발견은 목적지 없는 탐험이자 점유 없는 탐구의 과정이다. 어딘가를 유영하다가 이전에는 몰랐던 것, 생경한 것을 ‘찾는’ 행위를 작업의 방법론으로 삼고, 무엇을 보게 될지 미리 방향을 설정하지 않은 채 일단은 떠났으리라. 그렇게 그들이 경유지로 삼았던 것은 고전 텍스트나 설화부터 애니메이션, 열화상 카메라에 이르기까지 꽤나 큰 시공과 다양한 양태를 아우르고 있어 그들의 뒤를 좇다 보면 거슬러 올라가야 할 때도 있고 길잡이가 아쉬울 때도 있다. 돌이켜보면 무진형제가 재현하는 세계 안에는 역치를 넘는 어떤 자극이나 심리적인 동요를 일으킬만한 심대한 사건들은 없었다. 대신 줄넘기를 하는 소년, 새벽시장, 좋은 세상을 바라는 마음처럼 평범하고 차분하게 삶을 살아‘내어’ 온 주변과 시간들에 대해서 말해왔을 뿐이다. 반복되고 있기 때문에 굳이 되새기려 하지 않았던, 심심하고도 편재되어 있는 일상의 한 단편. 그래서 그 장면들이 특별히 어디이며 누구의 이야기인지 세세하게 따져 묻는 것이 소모적일 때도 있다. 무진형제는 주변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에둘러 낯선 곳을 헤맨다. 혼종적인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장면은 일상이지만 뜻밖의 모습을 하고 있고 기이하기까지 한 감각을 유발한다. 그리고 이 ‘발견된’ 주변은 어디의 누구라는 구체적인 좌표보다 앞서 있었던, 일상이 주는 익숙함에 가려져 있던, ‘왜’라는 보다 낮은 질문을 던진다. 어째서, 무슨 까닭으로 그런 모양을 갖게 되었을까. 전시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에서도 셋, 혹은 그 이상의 시간과 공간을 역류하고 통과하여 사람과 그를 감싸고 있는 공간, ‘집’을 펼쳐 보인다. 그것이 갖는 내밀함을 언어화하면 할수록 온전히 전달되지 못함에, 시시각각 낡아버리는 감정에 조금 애틋해지는 곳. 그곳에 목적 없이 일단 발을 내딛고 헤매다 아주 이상한 모양을 발견했다.
 
첫 번째 영상은 고령의 노인과 그만큼이나 긴 세월을 품었을 그의 집을 퍽 정직하게 살핀다. 노인의 성긴 머리카락이 새벽녘 안개와 여명 때문에 잠시 사라졌다가 나타난다. 밥을 먹고 통화를 하고 어딘가로 잠시 나서기도 한다. 우편물 봉투의 끄트머리를 뜯어내어 손톱에 묻은 얼룩을 닦는 것 정도가 예상 밖의 행위일 정도로 그의 하루는 적적하고 고요하게 흐른다. 전시장 가장 안쪽에 있는 두 번째 영상은 깊은 밤 산속, 무언가를 깎아 내려가는 인물을 보여준다. 그리고 화면은 아이스 링크장의 바닥을 미끄러지며 긁어 대다가 서서히 발 딛고 있는 땅을, 도시를, 그 너머 아득한 어딘가를 커다랗게 순회한다. 그리고 집에 ‘기대하는’ 말, 집에 ‘깃든’ 말을 고민한다. 하옥(夏屋), 안택(安宅), 아문(我門)은 모두 집을 뜻하나 집에 대한 각각 다른 척도를 드러낸다. 오래전 집은 자식의 자손까지 품을 만큼 컸어야 했고, 누군가에게 집은 끝끝내 마음을 편히 놓지 못하는 곳이었으며, 지금은 ‘내 것’에 대한 열망이 허망하게 접히는 곳이 되었다. 살 거(居)와 살 주(住)가 합쳐진 거주를 보자. 이는 ‘살다’를 뜻하지만 낱말을 하나씩 펼쳐보면 유한성에 대한 불안이 숨겨져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주(住)는 인간(人)이 방 한가운데 촛대(主)를 들고 있는 형상인데, 촛불이 꺼지면 동시에 주인공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두 개의 영상은 같은 제목을 갖고 있고 1과 2라는 숫자로만 나뉜다. 동일한 명제를 달고 있지만 어떻게 보아도 너무 다른 세계이다. 하나는 시선이 다르다. 지근거리에서 인물을, 수평에서 풍경을 바라보던 시선이 다음 영상에서는 부감으로 바닥의 무리들을 조망하다가 한없이 위로 솟구쳐 버린다. 둘은 목소리. 영상 전반에 깔리는 소음에 가까운 중얼거림에서 다음에는 화자가 있고 또렷하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셋은 흐름. 그는 더 이상 멀리 가고자 하는 충동이 없어 보였고, 다른 이들은 이제 멈추는 방법을 배워야 할 차례 같다. 두 영상은 서로와의 간극을, 장면과 장면 사이의 균열을 숨기지 않는다. 
 
사실, 시작은 낡은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할아버지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그렇게 그의 집과 일상을 가까이에서 기록하기 시작했고, 유일하게 놀랄 만큼 큰 소리가 나올 때가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잠에 빠져들었을 때였다. 처음의 영상에서 꿈인지 생시인 헷갈리는 장면들이 틈입되어 있는 것이 떠오를 것이다. 인위적인 색으로 물들고 있는 고요한 풍경, 엇박자를 내며 나지막이 신경을 긁는 잠꼬대,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박쥐처럼. 꿈에서 할아버지는 무엇을 보고 있을까. 소환된 과거일까, 변질된 기억일까, 뒤섞인 상상일까. 육체의 한계를 조금은 잊었나 보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사상과 경험뿐만 아니라 몽상도 인간적인 가치를 확정시킨다고 말한다. 그리고 집은 그러한 몽상과 몽상하는 이를 보호하며 꿈꾸게 한다. 소중하지만 잊고 있었던 오래전 기억과 추억이 집을 매개로 하여 불현듯 꿈속에서 되살아나는 것을 한 번쯤 경험해 봤을 것이다. 한때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으나 지금은 닫혀 있는 그의 창고가 꿈에서는 여전히 농기구와 곡식으로 가득할지 모를 일이다.
 
할아버지의 잠꼬대는 다른 시간과 공간 사이를 유영하게 만들었고, 집의 모양과 말을 곱씹게 하였으며, 아버지와 동세대들을 돌아보게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전시가 그들의, 아니 우리에게 집이 무엇이었고 무엇이어야 하는지 명시하지 않는다. 다만 그렇게 만들어진 혼재된 장면들과 뒤섞인 감각 사이를 좇다 보면 마지막에 이르러 또렷하게 잔상 하나를 남기는데, 등을 맞대고 어슷하게 선을 그어가다 비로소 하나로 맞물리는 원, 원에 대한 감각이 그것이다. 원은 점이자 면이고, 기반이 갖고 있는 최소이자 최대의 모양이다. 무수히 많은 작은 도약들이 원 위에서 번식하고 번식한다. 할아버지의 집에 여전히 생생한 떨림이 존재하는 것처럼, 과거의 소환이자 연결로서의 꿈은 시간 사이의, 세대 사이의 틈을 메우고 또 둥글게 감싼다. 집이 늘 그랬던 것처럼. 제목은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마지막 구절을 차용했다. 노인의 꿈에 등장하는 사자가 허망한 현실에도 놓지 못한 의지의 발현인 것처럼, 전시는 3대에 걸쳐 변해가고 있는 거주의 모양을 살피며, 삶이 무엇으로 어떻게 흘러가야 하는지 그 방향성을 묻는다. 
 
 
110-803 서울시 종로구 세검정로 9길 91-5(서울시 종로구 구기동 56-13)
전화 02 396 4805 | 팩스 02 396 9636 | altpool@altpool.org | © art space pool, seoul
풀의 홈페이지는 작가 양혜규의 후원으로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