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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명: 랜덤 포레스트 Random Forest
○ 작가: 홍진훤
○ 기획: 안소현, 홍진훤
○ 그래픽디자인: 강경탁(a-g-k.kr)
○ 공간디자인: 신익균
○ 기간: 2018년 6월 26일(화) ~ 8월 5일(일)
○ 오프닝: 2018년 6월 26일(화) 오후 6시
○ 장소: 아트 스페이스 풀
○ 관람시간: 11:00 ~ 18:00(매주 월요일 휴관)
○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창작산실 공간지원
 
*본 전시의 오프닝 행사는 KGB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 KGB 모히토(Mojito)와 함께 합니다.
 
 
 
사진가 없는 사진
                                                                                 안소현(아트 스페이스 풀 디렉터)
 
 
내가 이 사진들에서 읽고 싶지 않은 하나는 ‘홍진훤’이다. 사진가의 존재는 종종 사진을 읽는데 영향을 미친다. 사진을 보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눈을 사진가의 눈에 포개고, 그의 태도나 감정에 이입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진가의 존재와 행적은 사진의 의미를 직조하는 데 기여하지만, 사진을 읽는 방식을 제한하기도 한다. 사실 모든 사진 이미지와 현실 사이에는 틈이 있다. 사진가가 카메라로 기록한 이미지와 그가 목격하거나 기억하고 있는 장면은 같지 않다. 그리고 사진이 가리키는 현실과 사진이 같다고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진 이미지는 이미 추려내고 잘라낸 것이고, 사진가의 기억은 왜곡되고 구멍이 숭숭 뚫려 있으며, 사진에 대한 설명이 아무리 자세하다 해도 그것이 복잡한 현실을 고스란히 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진가가 그것을 봤다’는 사실 때문에 그 불연속적인 것들을 ‘같은 것’으로 묶어버린다. 사진가의 존재는 사진 이미지와 현실 사이의 수많은 틈을 덮어버린다.
 
대부분의 소위 ‘현장’ 사진가들이 그러하듯, 홍진훤도 순순히 사진의 한계를 인정한다. 사진은 폭력이며 현실을 온전하게 전달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계속 사진을 찍는다. 보여주지 않은, 보여줄 수 없는 사진이 많다고 했다. 그렇다면 사진들이 쌓여갈수록 허무도 쌓여갈 텐데, 그렇게 이미지로 봉분(封墳)을 만드는 것 같아 위태로워 보였다. 문득 고집스럽게 풀지 않는 사진가들의 하드 디스크가 그들을 버티게 하는 것 같았다. 바로 그런 사진가들의 자조 섞인 끈기 때문인지 그들의 사진에 대해 냉정한 비평을 하기가 어려웠다. 사진 이미지를 읽기보다는 사진가들이 어디에, 왜 갔는지 묻고, 나는 가지 못한 그곳에 사진가가 있었음에 한편으로 부채감을 가지고 다른 한편으로 안도했다. 땀에 젖은 어깨끈의 시큼한 환후(幻嗅)가 사진 이미지를 읽는 것을 방해했다. 
 
그래서 나는 홍진훤의 개인전에 부치는 이 글에서, 마치 그가 사진에서 사람을 지우듯, 사진가 홍진훤을 지워보기로 했다. 나는 이입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어떤 장소에서 보고 있었을 것을 상상하거나 허망한 시선을 따라가거나 그의 감정으로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한마디로 시선의 온도를 낮추기로 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덜 그의 생각에 물들기 위해 그를 ‘사진가'라고 부르기로 한다(때로는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것만으로도 어떤 정동(情動)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것은 오로지 이미지, 사진 이미지밖에 없다. 이미지에 발을 붙이고 차갑게 사진을 읽는 것, 여기서는 그것을 하려 한다.
 
 
부재도감(不在圖鑑)
 
우리에겐 사진을 디딤돌처럼 생각하는 버릇이 있어서 사진을 보자마자 그걸 딛고 그 너머의 현실로 건너뛰려 한다. 그곳은 어디인가? 그 사람은 누구인가? 무슨 일이 있었나? 답은 대체로 사진에 붙은 텍스트(제목이나 설명)에 의해 주어진다. 텍스트는 강한 자력으로 사진 이미지를 현실에 갖다 붙이며, 그것이 곧 사진의 힘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사진가를 지우려는 나는 그가 쓴 텍스트를 잠시 덮어두고 사진 이미지에, 아직 현실에 완전히 들러붙지 않은 사진 이미지에 좀 더 오래 머무르기로 했다. 혹은 사진 이미지가 현실에 붙고 난 후에도 이미지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보기로 했다. 그 이미지는 현실을 향해 이끌려가는 그냥 쇠붙이인가, 아니면 현실의 인력을 증폭시키는 나름의 자성(磁性)을 가졌는가? 혹은 현실의 인력에 저항하다 결국 그것에 맞붙는 순간 더 큰 충격을 발생시키는가? 이 전시에서 나의 관심은 '사진가'의 사진을 이미지로서 분류해보는 것이었다. 이때 이미지는 (아직) 텍스트에 종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지 위주의 분류 목록, 즉 도감(圖鑑)이 된다.
 
‘사진가’의 사진에서 가장 도드라진 감각을 하나 꼽으라면 그것은 ‘부재감'이다. 대부분 풍경에는 사람이 없고, 있다 해도 뒷모습만 보이며, 흐린 하늘과 극단적으로 고요한 화면은 무언가가 없다는 느낌을 준다. 대표적인 예가 서울의 번화가를 1000장 반복해서 촬영해서 사람과 차를 지운 사진이다(31)[1]. 하지만 이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엄밀히 말해 무언가가 없다고 해서 무조건 부재감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모든 사진은 한정된 대상(피사체)과 프레임 안쪽만을 선택하기 때문에 ‘무엇'을 찍지 않은 사진이란 없다. 따라서 ‘무엇’을 찍은 사진에서 무언가가 없다고 느껴질 때는 그 '없음'을 느끼게 하는 무언가가 '더' 있어야 한다. ‘사진가'의 사진들에는 부재감을 느끼게 하는 몇 가지 장치들이 있었다. 따라서 그런 장치에 따른 분류는 일종의 부재도감을 구성하게 한다.
 
첫 번째 장치는 피사체 혹은 그것이 놓인 맥락이다. 방안에 흐트러지지 않고 잘 개어 놓은 이불 한 무더기가 있는 사진이 있다(22). 그것은 자연스럽게 '사람이 오지 않았음'을 감지하게 한다. 사진의 어둑하고 냉랭한 빛 온도가 그런 느낌을 더한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다. 이곳이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인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의 수학여행 예정지였다는 텍스트를 읽는 순간, 보는 이를 당황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 사진의 고요함이다. 결코 감정의 동요 없이 떠올릴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 극단적으로 고요하고 무심해보이기까지 한 사진으로 기록되었을 때, 그것은 항력(抗力)을 만들어낸다. 이런 항력은 나무나 풀숲의 사진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인위적 표식이 거의 없는 식물들의 덤덤함 혹은 거의 알아채기 힘든 약간의 기괴함은 그 장소의 비극을 확인하는 순간 생경함으로 돌변하고, 식물들은 실어증에 걸린 목격자가 되어 버린다.
 
그런데 전남 보성에서 촬영한 사진들의 부재감은 결이 약간 다르다(45). 사람 없는 길의 한 자리를 비추는 가로등 불빛과 역시 사람 없는 시멘트 시골길이 습기를 머금어 드러난 윤기는 무대 위 스팟 조명처럼 ‘있어야 하는데 없는’ 것의 자리를 가리킨다. 이 사진은 사진 밖 현실의 무게와 대비를 드러내기보다는 사진 이미지 내부에서 한 부분을 떠냄으로써 부재감을 자아낸다. 또한 이 장면들이 고(故) 백남기 농민이 지나던 일상의 장소라는 것을 확인했을 때, 사진은 현실로부터의 거리를 부각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그곳에 얹힌다.
 
두번째 장치는 시각적 습관의 배반이다. 한강 수영장 사진(19)은 불친절하다. 수영장 윤곽선의 위아래가 평평하게 가까워서 형태를 파악하기 어려운 시점에서 찍힌 사진이다. 화면 앞 시멘트 바닥의 작은 물웅덩이가 주인공처럼 보일 정도이다. 납작하게 가라앉은 이 풍경은 무언가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밋밋한 사진을 보는 우리의 눈은 0점에 맞춰져 있지 않다. 누구나 사진을 찍고 누구나 사진을 돋보이게 할 줄 아는 시대다. 우리의 눈은 이미 돋보이는 사진들에 길들어 있는데 이 사진에는 그게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의도적 자제나 제거가 읽힌다. 이 사진이 의미의 첫 번째 문턱을 넘는 것은 이미 수많은 사진을 보아온 경험이 있는, 튀어나온 장면을 더 튀어나오게 촬영한 사진에 길든 우리의 눈 때문이다. 이 물러난 사진은 눈에 배인 습관(관성)과 기대를 저버림으로써 부재감을 만든다.
 
세 번째 장치는 시각적 효과(색, 빛, 톤 등)이다. 제주도 한림공원 사진(1)은 평범한 식물원을 찍은 것이다. 그나마 눈에 띄는 것은 전경의 붉은 꽃과 후경의 보색으로 번갈아 놓인 화분이다. '눈에 띄다'라는 표현조차 과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사물들이 못 보고 지나칠 정도로 평범한 데다, 사진에는 앞으로 어떤 사건이 일어날 전조(前兆)조차 없기 때문이다. 다만 신경 쓰이는 것은 그 알록달록함이 사진 전체의 흐릿하고 밋밋한 톤과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사진의 톤이 꽃과 화분의 색이 흔히 자아낼만한 밝고 경쾌한 정서가 무사히 생겨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 톤에 갇혀있던 관객은 이곳이 단원고의 수학여행 예정지였음을 알게 되는 순간, 이미지는 자연스러운 상태에서보다 더 큰 에너지로 그들의 부재를 눈앞에 '쿵' 떨어트려 놓는다.  
 
부재도감에는 계속 항목이 추가될 수 있다. 하나의 사진 이미지가 피사체, 현실, 그리고 이미지 내부에 더할 수 있는 부재의 감각은 여전히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쯤에서 우리의 관심을 전시로 옮겨놓으려 한다. 부재의 사진이 다른 부재의 사진과 한 공간에 있을 때, 즉 전시의 맥락 안에 들어올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무작위의 숲
 
‘사진가’는 전시 제목으로 '랜덤 포레스트'를 제안했다. 이 말은 원래 기계 학습(machine learning)에서 제약을 두지 않고 양적 증가와 우연을 통해 소통의 효과를 높이는 방법을 가리킨다. 즉, 알고리즘에서 무작위로 트리(tree)의 종류를 다양화하고 그 양을 늘려 정합성을 갖게 되는 것을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는 것에 비유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것은 '사진가'의 여러 사진을 시리즈와 관계없이 모아놓았을 때 어떤 의미가 발생하는지, 사진이 어떻게 ‘다시’ 읽힐 수 있는지 묻는 이 전시에 꽤 적합해 보였다. 하지만 제목은 이내 질문들을 불러냈다. 전시에서 소통은 곧 정합성을 확보하는 것일까? 전시는 관객들이 어긋남 없이 일정한 의미를 포착하게 해야 할까, 아니면 더 많은 질문으로 뻗어 나가게 해야 할까? '사진가'의 사진들은 대부분 분명한 사회적 사건을 계기로 촬영한 것이지만, 사건들을 직접 가리키거나 단번에 알아보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현실의 기록이지만 현실을 설명하지 않는 이 사진들을 전시를 통해 말하게 할 수 있을까? 각 전시 공간들은 이런 질문들에 근거한 몇 가지 실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방의 사진들은 그것이 가리키는 현실에 대해 좀처럼 말을 꺼낼 것 같지 않다. 무엇을 촬영했는지 알아보기 어렵진 않지만, 이미지만으로 공통의 주제를 찾아내긴 어렵다. 각 사진의 정보량은 매우 적고 읽어낼 만한 정서가 드러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흩어질 사진들을 한 공간에 모아놓았을 때 공통으로 붙잡을 거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예의 그 부재감이 사진들을 채우고 있으며, 그 부재감과 연결된 밋밋하지만 없다고 할 수 없는 아주 미세한 힘들이 엄존한다. 그 힘은 누런 개의 살짝 부른 배, 흐릿한 바다 위의 약간 덜 흐릿한 형상, 습기 찬 온실의 적당히 이국적인 식물, 물결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 두 다리 등에서 추려지는 힘이다. 그것은 미세한 강도()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 없는 차이, 굳이 생경한 이름을 붙이자면 '약간임'(영어로는 littleness에 가까운 의미) 정도가 될 것이다. 혹은 철학 개념으로 하면 '이것임(haecceity, thisness)'에 가깝다.[2]눈에 띄진 않지만 눈에 밟히는 사진적 실체(entity), 분명 일상적 장면과는 다르지만, 그 이유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은 미세한 차이의 덩어리들이 이 분홍색 방을 채우고 있다. 그리고 뒤늦게 (다른 방에서) 이 이미지들이 가리키는 현실의 사건들을 텍스트로 확인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상대적으로 그 사건들을 훨씬 무겁게 느낀다. 첫 번째 방에서는 이미지들 사이를 가볍게 넘어 다닐 수 있었지만, 사건의 무게를 확인하는 순간 이미지와 현실 사이의 엄청난 괴리감, 어쩌면 배신감마저 느낄 수 있다. 그 괴리감은 사진 이미지들에 말을 붙일 수 없었기 때문에 더 커졌을 수 있다. '사진가'는 자신의 사진에 대해 "이 풍경과 저 사실 사이의 아무 상관없어 보임이 의미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라고 물은 적이 있다. '상관없어 보임'은 아마 '이것임'과 '무거움' 사이의 큰 낙차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같은 방의 긴 가구에 놓인 수백 장의 사진들은 다름 아닌 그 낙차를 세분하여 경험하게 하는 스펙트럼이다. 모두 밀양 송전탑 반대 시위 현장 혹은 인근에서 찍은 이 사진들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나무의 이미지에서 시작하여 마을의 풍경들을 거쳐 시위와 대치의 장면들로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강제철거 현장의 격한 기록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스펙트럼은 여전히 답보다는 질문으로 데려간다.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현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시위 현장에 우두커니 서 있는 평범함 나무와 과격한 시위 문구가 적힌 현수막 사이에서 무엇이 진실에 접근하는 입구가 될까? 사진은 현실을 끌어당기지만, 그것은 곧 진실일 수 있을까? 방대한 스펙트럼은 하나의 답이 되지 못한채 그만큼 방대한 질문으로 남겨진다. 하지만 어쩌면 사진의 관객을 현실에 다가가게 하는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일지도 모른다.
 
밝은 방에서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면, 사진들은 미세한 강도로 속삭이는 것이 아니라 큰소리로 외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무가 기괴하게 자라나있고 자동차가 버려져 있는 텅 빈 후쿠시마(30, 32, 53, 55, 58)나 세월호와 관련해서 모여든 사람들(34, 36, 40, 42), 개발에 의해 사라질 혹은 어색하게 남은 풍경(28, 41, 56, 57, 59, 60), 시위나 장례의 풍경(43, 49, 50, 63) 등은 새된 경고의 목소리처럼 읽힌다. 그러나 아무리 목소리가 달라졌다고 해도 '사진가'의 사진이 현실에 대한 직설적 웅변이나 온전한 명제인 경우는 드물다. 이 사진들은 사진이 잘라낸 현실의 한 토막이 전체를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진의 부분성과 한계를 강조하려는 듯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전체 풍경이 아니라 장면 일부에 집중하고 있다. 게다가 잘 살펴보면 첫 번째 방의 사진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부재감을 드러낸 사진들도 많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사진들이 다르게 읽힐까?  
 
거의 동일해보이는 네 장의 흑백 초상 사진이 있다(27). 첫 번째 방에서 '이것임'의 감각을 체득한 예민한 관객이라면 이 사진들에서 미세한 동작과 의식의 변화를 알아차릴 것이다. 그 변화는 인접한 사진들로 옮겨가고 되돌아오는 행위를 (여러 번) 반복할 때 포착된다. 작고 깜깜한 방 안에는 나무와 풀숲이 웅성거리고 있다(29). 각각은 조금도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식물들이지만, 이들이 군락을 이루자 이상한 반사광, 생경한 형태 등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점차 위치, 주변 건물, 표시선 등의 인공적 요소들이 이상함을 보탠다. 이 식물들은 제주 4·3, 오키나와, 밀양 송전탑 시위, 상계동 개발 현장, 백남기 농민이 살았던 보성 등 각기 다른 비극의 장소에서 찍은 것들이다. 하지만 군락의 형태적 기괴함이 비극의 편재성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이, 보는 이는 사건들 사이의 '상관없음'을 잊게 된다. 길고 음산한 방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두 장의 사진이 도사리고 있다. 두 사진 사이에는 인접함과 크기 외에 아무런 연결지점이 없지만, 그 단순한 요소들이 두 사진을 같은 방법으로 읽게 만든다. 얼굴로 인해 나무는 초상처럼 표정을 갖고, 나무에 비친 빛으로 인해 얼굴에 반사된 빛에 눈이 간다. 그리고 텍스트를 읽으면 살을 부비고 살던 이의 부당한 죽음이 파고든 얼굴(47)과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농성장에 있던 나무를 파고들어 고사시키는 외래종 나무(48)를 한 덩어리로 묶게 된다. 그리고 나면 위에서 말한 사진들의 강도가 이 두 초상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깨닫는다. 양쪽 벽의 사진들은 강한 두 개의 자석의 주위의 쇳가루처럼 늘어서 있다. 그리고 각 사진도 인접한 다른 사진들과 함께 목소리를 내는 각자의 자성을 갖게 된다.
 
나는 사진가를 지우고 사진 이미지 안에 가능한 한 오래 머물러보려 했다. 이 이미지들은 부재감을 드러내는 방식에 따라 분류될 수 있었으며, 오로지 힘의 미세함만으로 묶이기도 하고, 인접한 사진들에 의해 목소리를 바꾸기도 했다. 그것은 컴퓨터가 사람의 의도를 전제하지 않고 이미지들을 무작위로 조합해서 의미를 솟아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 과정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미지 읽기는 우리를 다시 사진가로 되돌아가게 한다. 사진 이미지에서 '이것임'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사진가의 가장 미세한 목소리를 듣는 것이며, 그의 힘 조절 자체를 하나의 유의미한 수행으로 보는 것이다. 또 사진을 모으고 분류하고 배치한 효과를 읽는 것도 사진가가 사진을 촬영하는 행위뿐만 아니라 조합하고 재구성하는 행위까지 의미심장하게 보는 것이다. 그래서 허무하지만(그러나 이것이 개인전을 위한 글이라는 점에서는 다행히도) 우리는 홍진훤으로 되돌아온다. 그는 늘 그곳에 없는 것, 뒷모습, 평평해져 버린 비극의 현장을 고요하고 밋밋하게 촬영하지만, 그 사진들을 다시 보정하고 새로 출력하고 재분류하고 전시하는 행위를 통해 의미의 요철을 만든다. 그래서 홍진훤이 자주 말했듯 그에게서 사진가와 기획자의 행위는 구분되지 않는다. 그의 사진을 읽기 위해서는 그의 촬영의 궤적을 따라가야 할 뿐만 아니라 전시와 프로그래밍의 과정들을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다. 차가운 시선으로 이미지를 읽을수록 사진가의 뜨거운 궤적을 보게 되는 것, 홍진훤의 사진을 읽는 경험은 그렇게 압축될 수 있다.    
 
 


[1] 괄호 안의 숫자는 전시장바닥에 표기된 작품 번호이며, 전시장 내에 각 번호에 붙인 설명 텍스트가 있다.  
[2] '이것임(h(a)ecceity, thisness)'은 둔스 스코투스가 정리한 개념으로, 현대 학자들은 이 개념을 존재, 개체, 기호 이론 등으로 발전시켰다. 흥미로운 것은 찰스 샌더스 퍼어스(Charles S. Peirce)가 '이것임'을 "인덱스가 가리킬 때의 대상으로, 연속적인 자기동일성과 '힘있음(forcefulness)'으로 인해 다른 것들과 구분되지만, 두드러진 특징은 갖지 않는 것"으로 설명했다는 점이다(C. S. Peirce, The Regenerated Logic, 1896, CP 3.434). 사진이 본성상 현실을 가리키는 인덱스라고 한다면, 모든 사진은 다름 아닌 이 '이것임'에서 시작한다. 많은 사진가들은 거기에 새로운 기법과 조명과 효과들을 더하곤 하지만, 홍진훤은 이 시작 지점에 아직 더 캐낼 것이 있다고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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