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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명: 기체 액체 고체
○ 작가: 여다함
○ 기획: 안소현
○ 퍼포머: 공영선
○ 음악: 날씨
○ 영상 촬영/편집: 최윤석
○ 사진: 박해욱
○ 공간디자인: 양재형
○ 설치 도움: 김형준
○ 그래픽디자인: 들토끼들
○ 도움 주신 분들: 권병준, 여혜진, 최경주
○ 기간: 2019년 9월 17일(화) ~ 10월 20일(일)
○ 오프닝: 2019년 9월 17일(화) 오후 6시
○ 장소: 아트 스페이스 풀
○ 관람시간: 11:00~18:00 (매주 월요일 휴관)
*주차가 불가하니 대중교통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말이 빈 자리의 도시 산책 연습
 
안소현(아트 스페이스 풀 디렉터)
 
 
 
여다함이 만든 것 앞에서는 종종 말이 빈다. 그것이 난해해서라기보다는 자명해서 숨은 의미를 캐내거나 개념을 갖다 붙이는 것이 공허하게 느껴진다. 물질의 자명함은 때로 말을 부대끼게 한다. 개념을 향한 의지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전시 제목도 큰 말을 붙이려는 충동을 일찌감치 차단하는 듯 하다. 그래서 그의 작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추상적인 말로 문을 열려 하는 습관을 버리는 편이 낫다. 말로 다가가는 습관은 생각보다 질겨서 버리려면 반복적인 연습이 필요한데, 이 글도 그런 연습의 하나였으면 한다. 물론 말 대신 감각을 채워넣는 과정을 도리 없이 말로 풀어야 하는 이 상황이 얄궂기는 하다.
 
이 전시에는 프롤로그가 있다. 전시장 가장 큰 벽에 검은 바탕 위에 흰 선이 구불구불 지나가는 이미지가 걸려 있는데 제목은 <발밑>(2019)이다. 다가가 보면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갈라 가르마를 탄 정수리를 확대한 사진들이다. 신체를 확대해서 보는 일은 그 자체로 기묘할 수 밖에 없지만, 그보다 더 이상한 것은 머리 꼭대기에 붙은 ‘발밑'이라는 제목이다. 몸을 모로 뉘여 정수리를 밟고 선다고 상상해보자. 머리의 주인은 자신의 정수리 능선을 따라 난 가르마 오솔길을 볼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전시를 함으로써 머리의 주인도, 우리도 그 길을 보게 된다. 여다함은 그렇게 보지 못했던 길을 보고 보여주기 위해 전시를 한다. 
 
이제 뜨개질에서부터 연습을 시작해보자. 익숙한 방식대로라면 눈은 맨먼저 뜨개질의 결과물이 무엇을 닮았는지 찾을 것이다. 그 닮음이 정해진 상징으로 안내해줄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것은 산맥을 닮았으면서 곰팡이가 생각나게 하고(<무제>), 다른 것은 종유석 같기도 하지만 매달린 죽은 짐승처럼 보이기도 한다(<60촉 바디 랭귀지>). 또 다른 것은 <향로>라는 정직한 이름을 갖고 있고 연기도 내뿜지만 어쩐지 자꾸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내 여다함에게서 닮음은 효과적인 출발점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반면 뜨개질을 하는 동작과 과정은 이름을 붙이기는 쉽지 않지만 일관되다. 아무리 크고 넓은 면도 모두 하나의 코에서 시작하지만 코는 실을 당기기만 해도 사라져버린다. 모든 코는 실의 다른 위치에서 시작하며 아무도 완벽하게 같은 두 개의 코를 만들 수 없다. 실과 뜨는 방법이 같아도 결과가 같지 않다. 내가 시작한 것을 멈추지 않고도 다른 사람이 시작한 것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뜨개질은 동일성의 허무한 상실 또는 느슨한 동일성의 미덕을 갖고 있다. 게다가 뜨개질을 잘 하려면 말의 명령보다는 신경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그런 사실은 여럿이 대화를 나누며 뜨개질을 해보면 더 분명해진다. 여다함은 누군가 “뜨개질은 원래 혼자 하는 게 아니야”라고 한 말에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다고 했는데, 같이 할 때야말로 뜨개질은 의식적 궤도에서 벗어나 무의식적 신경의 궤도로 진입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렇게 뜨개실이 피어나고 자라나서 사라지는 과정에 주목하는 연습을 한다면, 그것이 ‘결과적으로' 고드름, 종유석, 향로 등을 닮은 것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고드름과 종유석은 액체와 고체가 구분되지 않는 상태로 자라고 제 몸이 아니었던 것과 만나 다시 하나가 되기도 한다(여기서 우리는 자기계발서 식의 교훈에 빠지지 않는 연습도 해야 한다). 우리는 처마밑과 동굴 속에서 벌어지는 이 생성을 드물거나 신비롭다고 하지만, 그렇게 느끼는 것은 우리가 고정된 말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흐르는 것을 흐르는 채로, 변하는 것을 변하는 채로 사유하지 못하게 하는 말의 구속은 참으로 거추장스러운데, 느슨한 동일성을 가진 존재들은 그렇게 말이 사유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래서 뜨개실이 향로로 자라나는 것과 그 향로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은 굳이 구분해서 말을 더하지 않아도 되는 자연스러운 생성이다.
 
다음으로 연습할 것은 부서짐의 감각이다. 여다함은 신경의 명령과 마찬가지로 잠의 경험을 기록하고 싶어하지만 그것은 당연히 온전한 언어를 얻기 힘든 것이다. 잠의 경험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잠을 깨는 순간 순식간에 부서져 버린다. 간혹 몇 마디를 남기지만 그 말들조차 규범의 언어에 의해 소통의 밖으로 밀려나 부서져 버린다. 그래서 작가에게 잠은 죽음의 연습이다. 그 경험을 그나마 가장 가까이서 밖으로 기록하는 것은 이불이다. 이불은 자는 동안의 몸의 움직임을 들썩거림, 뒤척거림, 몸부림의 물결로 만든다. 하지만 그 물결도 계속 부서지며 자고 일어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는 매한가지다. 이불이 “내일 부서질 무덤'인 것은 그 때문이다. 여다함은 초현실주의자들처럼 무의식의 세계를 호기롭게 시각화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라짐을 관찰한다. 그가 말하는 무의식은 라깡이 말하듯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기는 커녕, 언어에 다다르지 못할 만큼 조금씩 밀려왔다 밀려가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여다함이 말하는 죽음에는 어떠한 비장감도 없다. 잠이 죽음과 엮여서 거창해진다기보다는 죽음이 잠이라는 체험 학습을 통해 친근해진다. 그래서 전시된 <내일 부서지는 무덤>(2019)의 이불은 보드랍고 폭신하고 홑청의 파도 무늬는 당장 끌어안고 싶게 다정하다. 동명의 공연에서는 퍼포머가 장소를 가득 메운 커다랗고 포근한 누비 이불을 관객들과 나눠덮는다. 잠은 그래서 날마다 한 코씩 떴다 풀어버리는 죽음이다. 우리는 그냥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뜨개질을 할 때처럼 우리가 언어화 할 수 없는 죽음의 시간들을 조금씩 떠본다. 그러다보면 어느날 목에 턱하니 죽음이 둘러질 것이다.
 
또 다른 연습은 ‘구멍'에 관한 것이다. 퍼포먼스 <내일 부서지는 무덤>과 영상 <경>(2019)에는 사각의 거울을 들고 천천히 움직이는 퍼포머가 나온다. 거울은 퍼포머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퍼포머가 있는 주변 환경을 담거나 팔과 다리 등 신체의 일부분만을 복제한다. 그래서 그는 완전히 없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그냥 있을 때보다 좀 더 사라져 보인다. 그는 단단한 껍질을 가진 온전한 신체가 아니라 완전히 규정되지 않은 채로 일단 거기 있는 신체, 때로는 ‘하나'라고 부를 수도 없는 ‘부분'이나 ‘여러 부분들'처럼 느껴지는 괴물이다. 따라서 여다함의 거울은 눈을 똑바로 뜨고 거울을 마주보며 ‘나는 저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확인하는 자아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세상의 구멍이 되는, 굳이 이름하자면 내 안의 ‘비’자아를 위한 공간이다. 거울-구멍은 그렇게 세상을 다층으로 만들어 다른 깊이에서 바라보게 만드는 동시에 부분적으로만 존재하는 것들에 의해 지탱된다. 그 느리고 뒤뚱거리는 움직임이 묘하게 애틋한 정서를 자아내는 것은 아마도 우리가 세상을 지탱한다고 믿었던 것들이 그런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뜨개실도, 이불도, 거울도 여전히 익숙하고 평범하다. 여다함은 그 사물들이 대단한 진리의 담지자라고 외치지 않는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사람들이 이름만 붙여놓고 만족한, 너무 쉽게 알고 있다고 단정한 것들이 여전히 있다. 여다함이 만들어놓은 것에서 그렇게 동일성을 허무하게 상실한 것, 순식간에 부서져버리는 것, 사라지고 부분으로만 지탱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감각하는 법을 연습하다보면, 우리는 번잡한 도시에 적합하게 산책하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상품이 되어버린 명상처럼 완벽히 고요하고 인적이 드문 자연 같은 것은 굳이 필요 없다. 퍼포먼스를 기록한 영상 <과테말라 5000>(2017)에서 볼 수 있듯이 차와 사람이 넘쳐나는 도시에 적합한 산책이란 도시의 효용과 관계 없는 움직임들을 장려하는 것이다. 이 공연은 2015년부터 <매우 만족 만족 보통 불만족 매우 불만족>이나 <별똥별 체조>에서 보여주었던 ‘얼음 풍선’(헬륨 가스 풍선에 얼음을 매단 것으로 작가는 ‘갈등을 구조화한 장치’라고 부른다)에 청각적 요소를 더한 것이다. 서로 반대방향으로 당기는 얼음과 풍선에 사운드 센서를 더해 그들 사이의 긴장이 움직임과 소리로 드러나게 하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길거리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며 부유하는 얼음 풍선은 도시의 피부를 매만지는 물결이 된다. 지난 해 ‘보안여관'에서 한 퍼포먼스 <객지 여덟 밤>에서는 관객들을 통의동 일대를 걷는 밤산책에 초대해서 그림자로 쓴 꿈 속 이야기를 전해주고, 관객으로 하여금 이불을 덮고 누워 여러가지 소리를 듣고 소리의 진동을 느끼게 하였다. 낯선 잠자리에서 이불을 덮고 듣는 낯선 소리로 인해 관객들은 도시에서 남의 꿈을 훔쳐 들은 것 같은 두근거림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도시의 벽면을 뒤덮은 전단지의 숲에서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남은 흔적 이미지들은 베어진 나무 그루터기처럼 시선을 쉬어가게 만든다(<벌목꾼-어흥>(2019)). 여다함의 미덕은 마디를 만들다 놓친 것들, 이름을 붙이다 잊은 것들을 요란한 초월 동작 없이 이야기해준다는 것이다. 그의 작업 앞에서 연습을 반복할 수록 우리는 여기를 벗어나 다른 세계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메마른 각질로 가득한 도시를 찬찬히 다시 더듬는 감각을 익히게 된다. 늘 보던 것들로 지금 이곳을 달리 보게 하는 것, 예술이 말에 짓눌려 종종 잊은 그것, 도시 산책자가 비로소 깨워 준 대단하지 않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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