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은 장기에 걸쳐 가변적인 형태와 매체로 확장되는 동시대 미술의 작업생산방식을 고려하여 프로덕션 과정에서 벌어지는 연구, 토론, 해외 레지던시 체류, 스크리닝, pdf 프리젠테이션, 글, 서적 발간, 온라인 대화 등 작업 소개 방식과 형태를 다양화 하고자 합니다.

풀은 자체적으로 주관하고 주최하는 인하우스 전시사업 외에 국내외 미술기관, 사회단체, 작가, 독립기획자, 학교 등과의 협업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공동기획 프로젝트, 해외 레지던시 진출, 왭을 통한 컨텐츠 공유, 연계사업 등 외부 진출, 연계사업을 다양하게 확장합니다.

CURRENT

○ 전시명: 코스믹 조크 Cosmic Jokes
○ 작가: 노재운
○ 기획: 안소현
○ 그래픽디자인: 강경탁(a-g-k.kr)
○ 공간디자인: 김형준
○ 기간: 2018년 8월 30일(목) ~10월 14일(일)
○ 오프닝: 2018년 8월 30일(목) 오후 6시
○ 장소: 아트 스페이스 풀
○ 관람시간: 11:00 ~ 18:00 (매주 월요일, 9월 23일-25일 휴관)
○ 후원: 문화체육관광부,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노재운 개인전
코스믹 조크

안소현(아트 스페이스 풀 디렉터)
 
 
"좋은 예술에는 항상 우주적 농담이 있다고
그대들은 속삭인다. 진짜?" (5「지옥」[1])
 
 
노재운은 문학이나 영화의 한 장르인'코스믹 호러(cosmic horror)'를 참고하여 '코스믹 조크'를 제안한다. '코스믹 호러’에서 공포는 인간이 가늠할 수 있는 범위를 초월하기에, 인간은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렇다면 '코스믹 조크'라는 장르가 있다면 어떨까?노재운은 묻는다. 세계의 속도가 너무 빨라 무력해진 인간의 웃음은 자조적이고 허탈할까, 아니면 오히려 긍정적이고 적극적일까?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한 힌트는 물론 노재운의 작업이다. 어쨌거나 그가 생각하는'좋은 예술'이 무엇인지 더듬어가다 보면 우주적 농담이 무엇인지 알게 되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게 된다. 노재운이 끊임없이 이미지를 캐내오는'기억의 우주'라고 부르는 영화사 안으로 따라들어가보거나[2]'본생경'이나 '목련존자'의 이야기들을 찾아 읽어보면 뭔가 좀 더 손에 잡히는 것을 얻게 될 것 같다.
 
그런데 막상 작가는 작품의 원인과 모티브를 제시하고 배경 이야기를 읽게 하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반대로 그는 선후관계가 없고 하나로 묶을 수 없는 것을'비헐리우드적'이라 부르며 긍정한다(17「인터페이스 매뉴얼」). 또"인과율과 내러티브라는 영화의 보편적 속성들을 완전히 먹어버린 슈퍼 내러티브의 세계"(20「세계의 심장」)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그렇다면 노재운의 작업을 비헐리우드적 방식으로 읽을 수  있을까? 위 문장으로 돌아가보자. 글에서 '그대들'은 코미디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버스터 키튼(Buster Keaton),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 자크 타티(Jacques Tati)를 가리킨다. 이들의 코미디는 노재운이 말하는 헐리우드의 전형과는 거리가 멀다(그들 각각은 헐리우드에서 밀려나거나 거부되거나, 헐리우드를 거부했다). 분명 이 영화들의 내용이 노재운 작업의 직접적 주제가 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들이'속삭인' 것들, 그들이 웃음을 주는 방식은 노재운의 작업과 세상을 보는 태도와 묘하게 겹친다.
 
 
하나. 우리는 못 보는 것을 그는 보고 있다 

코미디 영화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기본 장치 중 하나는 등장인물은 볼 수 없지만, 관객은 볼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관객들은 양쪽을 대조하면서 때로는 인물의 예정된 실패를 알고 킬킬거리고, 때로는 인물은 깨닫지 못하는 극복과 성취를 보며 흐뭇해 한다.
 
노재운은 코미디 영화의 관객의 위치에서, 관성에 갇힌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주시한다. <요한에게-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문>(1996)은 존 페리 발로우(John Perry Barlow)의"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문"의 텍스트에 어느 도시의 '구글어스'의 이미지들, 북한 영화<홍길동> (1986, 조선 예술영화제작소 제작)에서 발췌한 장면들을 결합한 영상이다. 20여 년 전에 발표된 발로우의 글은 사이버스페이스의 도래에 대한 희망에 부풀어 당시 현실 권력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호기로운 선언문인데, 현재의 사이버스페이스에서 규제와 통제를 강화하는 상황과 대조적이다. '구글어스'는 놀랍도록 정교한 실사 이미지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현실 이데올로기의 경계를 완전히 넘어서지는 못한다(한국이나 러시아의 서비스 규제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래서 노재운은 한편으로는 현실에서 부족한 자유를 보충하려는 듯 정처 없이 사이버 세계의 도시를 훑고 다니고, 다른 한편으로는 빠른 스크롤을 이용해 현실 이미지를 초/비현실적으로 만든다. 또 북한의 최고 흥행 영화<홍길동>(1986)에서 발췌한 이상향을 꿈꾸는 영웅의 몸동작을 반복 편집하여 기묘한 허무감을 만든다. 노재운은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자유를 그리던 사람들이 예견된 실패를 향해 달리고 현실의 한계에 부딪히는 것을 지켜보기도 하고, 그들이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꿈꾸는 세계를 이미지로 구현한다. 그는 코미디 영화의 충실하고도 진지한 관객인 것이다.
 
 
둘. 기하학적 공간  
 
세 감독의 영화에서는 기하학적 형태의 공간이 자주 등장한다. 동일한 기하학적 형태가 반복되는 공간은 거기서 인물이 빠져나오는 데 애를 먹거나 같은 동작을 반복하게 해서 슬랩스틱 코미디의 웃음을 유발하며, 그 반복적 형태만으로도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내기도 한다. 원형 공간을 맴도는 장면에서는 웃음과 더불어 반복되는 삶의 안쓰러움이나 세기말적 정서를 드러내기도 한다. 회전하는 개체들은 무력하고 나른하기도 하고(타티), 씁쓸하기도 하고(채플린), 아슬아슬하기도(키튼) 하다.
 
노재운도 기하학적 형태의'효과'에 관심을 갖고 작업의 모티브로 활용해왔다. 영화사에 나타났던 스크린의 다양한 비율을 적용한 판으로 구성한 공간('화면비' 시리즈)은 우리의 시각 조건의 변천사를 보여준다. 작가가 런칭한'C12픽쳐스'의 대표적 기법으로 소개한 '평상숏' 역시 마찬가지다. 그에 따르면 사방이 열린 높이 45cm의 평상은 '친밀한 시공간'을 가능하게 하며, 모든 각도를 소박하게 연결한다. (25「평상의 높이」)
 
그리고 노재운은 오늘날 시각에서 가장 지배적인 프레임 형태는 소셜 네트워크'인스타그램'의 정사각형이라고 주장한다. <인시네마그램>(2018)은 이 정사각형 프레임 안에20세기 영화의 장면들을 밀어 넣은 것이다. 정사각형은 획일적이지만, 거기에 다른 시대의 다른 비율의 이미지들이 결합한 것이 어딘가 생경하게 느껴진다면 이 기하학적 형태는 분명 어떤 패러다임을 읽는 기제로 작동할 수 있다. 
 
 
셋. 시공간의 이상한 조합 
 
코미디 영화에서는 종종 시공간의 이상한 조합이 나타난다. 일상적이고 익숙한 시간의 흐름보다는 엄청나게 빠르거나 느린 시간이 설정되기도 하고,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공간적 연결도 자주 등장한다. 그래서 이미지에 컴퓨터 그래픽이 적용되기 전에는 위대한 코미디 영화배우들은 대부분 위대한 스턴트맨이었다. 그들은 신체 단련을 통해 일상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속도나 움직임을 만들어냈고, 오늘날은 특수효과가 그 역할을 대체하게 되었다. 스턴트와 특수효과는 진행 방식과 원리는 전혀 다르지만(반대인 것 같지만), 결과의 이미지를 보면 결국 지향하는 바는 같다. 특정 시공간에서 제약이 크거나(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이미지로는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면 중력과 신체적 한계가 없는 것 같은 장면을 만들거나 시공간의 예상치 못한 조합을 만드는 것이다. 
 
시공간의 이상한 조합은 노재운이 즐겨쓰는 작업 방식이다. 이미 언급한<인시네마그램>도 그에 해당하며, 여러 기술낙관론자가 인류사의 분기점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2045년의 달력을 만든 <특이점 달력>이 대표적인 예이다. <목성>은20세기 아방가르드의 악보와 영화사에 등장했던 화면비를 조합한'화면비 악보' 시리즈 중 하나이다. 역사적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기존의 기보법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소리나 리듬을 표현하기 위해 이른바'그래픽' 악보를 만들었다. 악보는 원래 시간을 공간으로 표현한 것이지만, 그들은 그런 공간적 성격을 더욱 극대화하여 악보를 시각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바 있다. 노재운은 거기에 영화사라는 시간 축에 등장했던 공간적 비례들을 결합하여 그야말로 시공간의 복잡계를 구성한다.  
 
노재운은 특수효과의 세상이 확대되면, 점차 자연이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영화나 게임, 그래픽 세계에서 지팡이는 그런 사라짐, 이동할 수 없는 것을 이동시키는 효과를 만들어내는 가장 전형적인 도구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런 기술적으로 전능한 지팡이보다는 기술발전의 속도에 함몰되지 않은 새로운 특수효과를 꿈꾼다. 세상이 점점 재난의 과포화 상태가 되면 병원선의 신경 외과의는 누구보다 분주해질 것이며(<병원선>), 인간의 뇌도 점차 사라질 것이다(<뇌사경>)! 그런 생각을 하면 키튼과 채플린의 지팡이, 타티의 우산이 어쩐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그 작은 소품이 만들어내는'피식' 웃음은 소심한 인간이 시도한 특수효과일 수 있다.   
 
 
넷. 매혹의 대가 
 
코미디 영화에서는 많은 사건이 매혹으로 인해 일어난다. 왠지 끌리는 사소한 물건에서부터 지독하게 사랑하는 사람까지, 매혹은 사람을 집착하게 하고, 무모하게 하고, 결국 아슬아슬한 순간들에 처하게 한다.
 
노재운은 영화사라는 기억의 우주에 매혹된다. 세계는 점점 비극으로 채워지고,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남북한의 정세가 한 치 앞을 모르게 펼쳐지는 복잡한 상황을 마주할 때면 그는 영화사의 이미지와 대사들을 발췌한다. 때로는'발췌'라는 행위 자체가 정서를 증폭시키면서도 섬세하게 만들기도 한다. 노재운이'메타그라피'라고 이름한 텍스트 조각인 <#죽지않고살겠다>는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치카마츠 이야기>(1954)의 대사를 발췌해 만든 것이다. 자살 직전 남자가 여자에게 뒤늦은 사랑 고백을 하자 여자는"죽지 않고 살겠다!"고 말한다. 혹자는 이 영화가 지독한 비극의 끝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희한한 영화라고 했다. 노재운은 칼 마르크스의 문장을 발췌 변형한다. "시간은 반복되네 한번은 느와르 한번은 에스에프로."(27「-Noir-SF-」)    
 
코미디 영화에서 정념(passion)을 드러내는 방식은 일반적인 드라마에서와는 다르다. 코미디의 거장들은 키튼의'스톤 페이스'에서 알 수 있듯, 격한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미세한 몸짓과 표정으로 정념을 표현한다.[3] 타티는 주인공 윌로의 동작과는 무관한 소음들을 녹여 넣어 친근하고 아련한 톤을 만든다. 노재운은 때로는 영상의 발췌, 지연, 반복을 통해 정념을 강조하기도 하고, 때로는 해당 장면을 픽셀이 보이도록 확대해서 보여주기도 한다. 이때 픽셀은 서로 다른 시간의 영상 이미지를 병치시킨 증거인 동시에 정념을 미세하게 쪼개는 장치이기도 하다.

"만약,
정서에도 입자가 있다면
일련의 이미지들로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이제 우리는 소립자의 수준에까지 내려가지 않으면 안된다."
(32「보편적 남녀」)
 
  
노재운은 채플린처럼 하염없이 넘어지는 세상을 관찰하고, 키튼처럼 효율과 먼 장치들을 고안하고, 타티처럼 세상의 미세한 소리들을 끌어안는다. 노재운의'코스믹 조크'는 호탕한 박장대소를 허락할 리 없다. 정교하고 반듯한 공간과 뒤엉킨 시간과 발췌한 이미지들은 무력한 인간들의 얼굴에 잠깐 비칠 듯 말 듯한 웃음을 선사한다. 그것은 신기할 것 없어'특수한' 효과같아서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화면비의 변화가 우리의 시각계를 뒤집어놓았듯 세계의 무너져내림을 잠깐 정지시킨 뒤, 그 몰락의 방향을 뒤집을지 누가 알겠는가. 노재운의 작업에서 미세한 엇박자와 끊김을 감지한다면, 일단 피식 웃고 나서 생각해보라. '방금 무언가 뒤집어진 것은 아닐까?'

 
 

[1]본문 중 괄호 안의 표기는 노재운의 책『코스믹 조크』(2018)에서 인용한 것으로, 글 제목과 번호를 붙였다.
[2]노재운의<오 솔레미오>의 장면을 발췌한 원작 영화<서울의 휴일>(1956)에 대해 영화평론가 유운성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이런 시도를 한 바 있다. "나이트 스터디",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2016년11월30일.  
[3]그래서 노재운은 정당하게도, 키튼, 채플린과 더불어 무성 코미디 영화의3대 감독 중 하나인 해롤드 로이드(Harold Lloyd) 대신 타티를 선택했다. 로이드는 표정이 지나치게 풍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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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

 
○ 전시명: 랜덤 포레스트 Random Forest
○ 작가: 홍진훤
○ 기획: 안소현, 홍진훤
○ 그래픽디자인: 강경탁(a-g-k.kr)
○ 공간디자인: 신익균
○ 기간: 2018년 6월 26일(화)  ~ 8월 5일(일)
○ 오프닝: 2018년 6월 26일(화) 오후 6시
○ 장소: 아트 스페이스 풀
○ 관람시간: 11:00 ~ 18:00(매주 월요일 휴관)
○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창작산실 공간지원
 
*본 전시의 오프닝 행사는 KGB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 KGB 모히토(Mojito)와 함께 합니다.
 
 
 
사진가 없는 사진
                                                                                 안소현(아트 스페이스 풀 디렉터)
 
 
내가 이 사진들에서 읽고 싶지 않은 하나는 ‘홍진훤’이다. 사진가의 존재는 종종 사진을 읽는데 영향을 미친다. 사진을 보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눈을 사진가의 눈에 포개고, 그의 태도나 감정에 이입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진가의 존재와 행적은 사진의 의미를 직조하는 데 기여하지만, 사진을 읽는 방식을 제한하기도 한다. 사실 모든 사진 이미지와 현실 사이에는 틈이 있다. 사진가가 카메라로 기록한 이미지와 그가 목격하거나 기억하고 있는 장면은 같지 않다. 그리고 사진이 가리키는 현실과 사진이 같다고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진 이미지는 이미 추려내고 잘라낸 것이고, 사진가의 기억은 왜곡되고 구멍이 숭숭 뚫려 있으며, 사진에 대한 설명이 아무리 자세하다 해도 그것이 복잡한 현실을 고스란히 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진가가 그것을 봤다’는 사실 때문에 그 불연속적인 것들을 ‘같은 것’으로 묶어버린다. 사진가의 존재는 사진 이미지와 현실 사이의 수많은 틈을 덮어버린다.
 
대부분의 소위 ‘현장’ 사진가들이 그러하듯, 홍진훤도 순순히 사진의 한계를 인정한다. 사진은 폭력이며 현실을 온전하게 전달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계속 사진을 찍는다. 보여주지 않은, 보여줄 수 없는 사진이 많다고 했다. 그렇다면 사진들이 쌓여갈수록 허무도 쌓여갈 텐데, 그렇게 이미지로 봉분(封墳)을 만드는 것 같아 위태로워 보였다. 문득 고집스럽게 풀지 않는 사진가들의 하드 디스크가 그들을 버티게 하는 것 같았다. 바로 그런 사진가들의 자조 섞인 끈기 때문인지 그들의 사진에 대해 냉정한 비평을 하기가 어려웠다. 사진 이미지를 읽기보다는 사진가들이 어디에, 왜 갔는지 묻고, 나는 가지 못한 그곳에 사진가가 있었음에 한편으로 부채감을 가지고 다른 한편으로 안도했다. 땀에 젖은 어깨끈의 시큼한 환후(幻嗅)가 사진 이미지를 읽는 것을 방해했다. 
 
그래서 나는 홍진훤의 개인전에 부치는 이 글에서, 마치 그가 사진에서 사람을 지우듯, 사진가 홍진훤을 지워보기로 했다. 나는 이입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어떤 장소에서 보고 있었을 것을 상상하거나 허망한 시선을 따라가거나 그의 감정으로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한마디로 시선의 온도를 낮추기로 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덜 그의 생각에 물들기 위해 그를 ‘사진가'라고 부르기로 한다(때로는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것만으로도 어떤 정동(情動)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것은 오로지 이미지, 사진 이미지밖에 없다. 이미지에 발을 붙이고 차갑게 사진을 읽는 것, 여기서는 그것을 하려 한다.
 
 
부재도감(不在圖鑑)
 
우리에겐 사진을 디딤돌처럼 생각하는 버릇이 있어서 사진을 보자마자 그걸 딛고 그 너머의 현실로 건너뛰려 한다. 그곳은 어디인가? 그 사람은 누구인가? 무슨 일이 있었나? 답은 대체로 사진에 붙은 텍스트(제목이나 설명)에 의해 주어진다. 텍스트는 강한 자력으로 사진 이미지를 현실에 갖다 붙이며, 그것이 곧 사진의 힘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사진가를 지우려는 나는 그가 쓴 텍스트를 잠시 덮어두고 사진 이미지에, 아직 현실에 완전히 들러붙지 않은 사진 이미지에 좀 더 오래 머무르기로 했다. 혹은 사진 이미지가 현실에 붙고 난 후에도 이미지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보기로 했다. 그 이미지는 현실을 향해 이끌려가는 그냥 쇠붙이인가, 아니면 현실의 인력을 증폭시키는 나름의 자성(磁性)을 가졌는가? 혹은 현실의 인력에 저항하다 결국 그것에 맞붙는 순간 더 큰 충격을 발생시키는가? 이 전시에서 나의 관심은 '사진가'의 사진을 이미지로서 분류해보는 것이었다. 이때 이미지는 (아직) 텍스트에 종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지 위주의 분류 목록, 즉 도감(圖鑑)이 된다.
 
‘사진가’의 사진에서 가장 도드라진 감각을 하나 꼽으라면 그것은 ‘부재감'이다. 대부분 풍경에는 사람이 없고, 있다 해도 뒷모습만 보이며, 흐린 하늘과 극단적으로 고요한 화면은 무언가가 없다는 느낌을 준다. 대표적인 예가 서울의 번화가를 1000장 반복해서 촬영해서 사람과 차를 지운 사진이다(31)[1]. 하지만 이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엄밀히 말해 무언가가 없다고 해서 무조건 부재감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모든 사진은 한정된 대상(피사체)과 프레임 안쪽만을 선택하기 때문에 ‘무엇'을 찍지 않은 사진이란 없다. 따라서 ‘무엇’을 찍은 사진에서 무언가가 없다고 느껴질 때는 그 '없음'을 느끼게 하는 무언가가 '더' 있어야 한다. ‘사진가'의 사진들에는 부재감을 느끼게 하는 몇 가지 장치들이 있었다. 따라서 그런 장치에 따른 분류는 일종의 부재도감을 구성하게 한다.
 
첫 번째 장치는 피사체 혹은 그것이 놓인 맥락이다. 방안에 흐트러지지 않고 잘 개어 놓은 이불 한 무더기가 있는 사진이 있다(22). 그것은 자연스럽게 '사람이 오지 않았음'을 감지하게 한다. 사진의 어둑하고 냉랭한 빛 온도가 그런 느낌을 더한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다. 이곳이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인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의 수학여행 예정지였다는 텍스트를 읽는 순간, 보는 이를 당황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 사진의 고요함이다. 결코 감정의 동요 없이 떠올릴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 극단적으로 고요하고 무심해보이기까지 한 사진으로 기록되었을 때, 그것은 항력(抗力)을 만들어낸다. 이런 항력은 나무나 풀숲의 사진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인위적 표식이 거의 없는 식물들의 덤덤함 혹은 거의 알아채기 힘든 약간의 기괴함은 그 장소의 비극을 확인하는 순간 생경함으로 돌변하고, 식물들은 실어증에 걸린 목격자가 되어 버린다.
 
그런데 전남 보성에서 촬영한 사진들의 부재감은 결이 약간 다르다(45). 사람 없는 길의 한 자리를 비추는 가로등 불빛과 역시 사람 없는 시멘트 시골길이 습기를 머금어 드러난 윤기는 무대 위 스팟 조명처럼 ‘있어야 하는데 없는’ 것의 자리를 가리킨다. 이 사진은 사진 밖 현실의 무게와 대비를 드러내기보다는 사진 이미지 내부에서 한 부분을 떠냄으로써 부재감을 자아낸다. 또한 이 장면들이 고(故) 백남기 농민이 지나던 일상의 장소라는 것을 확인했을 때, 사진은 현실로부터의 거리를 부각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그곳에 얹힌다.
 
두번째 장치는 시각적 습관의 배반이다. 한강 수영장 사진(19)은 불친절하다. 수영장 윤곽선의 위아래가 평평하게 가까워서 형태를 파악하기 어려운 시점에서 찍힌 사진이다. 화면 앞 시멘트 바닥의 작은 물웅덩이가 주인공처럼 보일 정도이다. 납작하게 가라앉은 이 풍경은 무언가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밋밋한 사진을 보는 우리의 눈은 0점에 맞춰져 있지 않다. 누구나 사진을 찍고 누구나 사진을 돋보이게 할 줄 아는 시대다. 우리의 눈은 이미 돋보이는 사진들에 길들어 있는데 이 사진에는 그게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의도적 자제나 제거가 읽힌다. 이 사진이 의미의 첫 번째 문턱을 넘는 것은 이미 수많은 사진을 보아온 경험이 있는, 튀어나온 장면을 더 튀어나오게 촬영한 사진에 길든 우리의 눈 때문이다. 이 물러난 사진은 눈에 배인 습관(관성)과 기대를 저버림으로써 부재감을 만든다.
 
세 번째 장치는 시각적 효과(색, 빛, 톤 등)이다. 제주도 한림공원 사진(1)은 평범한 식물원을 찍은 것이다. 그나마 눈에 띄는 것은 전경의 붉은 꽃과 후경의 보색으로 번갈아 놓인 화분이다. '눈에 띄다'라는 표현조차 과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사물들이 못 보고 지나칠 정도로 평범한 데다, 사진에는 앞으로 어떤 사건이 일어날 전조(前兆)조차 없기 때문이다. 다만 신경 쓰이는 것은 그 알록달록함이 사진 전체의 흐릿하고 밋밋한 톤과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사진의 톤이 꽃과 화분의 색이 흔히 자아낼만한 밝고 경쾌한 정서가 무사히 생겨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 톤에 갇혀있던 관객은 이곳이 단원고의 수학여행 예정지였음을 알게 되는 순간, 이미지는 자연스러운 상태에서보다 더 큰 에너지로 그들의 부재를 눈앞에 '쿵' 떨어트려 놓는다.  
 
부재도감에는 계속 항목이 추가될 수 있다. 하나의 사진 이미지가 피사체, 현실, 그리고 이미지 내부에 더할 수 있는 부재의 감각은 여전히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쯤에서 우리의 관심을 전시로 옮겨놓으려 한다. 부재의 사진이 다른 부재의 사진과 한 공간에 있을 때, 즉 전시의 맥락 안에 들어올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무작위의 숲
 
‘사진가’는 전시 제목으로 '랜덤 포레스트'를 제안했다. 이 말은 원래 기계 학습(machine learning)에서 제약을 두지 않고 양적 증가와 우연을 통해 소통의 효과를 높이는 방법을 가리킨다. 즉, 알고리즘에서 무작위로 트리(tree)의 종류를 다양화하고 그 양을 늘려 정합성을 갖게 되는 것을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는 것에 비유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것은 '사진가'의 여러 사진을 시리즈와 관계없이 모아놓았을 때 어떤 의미가 발생하는지, 사진이 어떻게 ‘다시’ 읽힐 수 있는지 묻는 이 전시에 꽤 적합해 보였다. 하지만 제목은 이내 질문들을 불러냈다. 전시에서 소통은 곧 정합성을 확보하는 것일까? 전시는 관객들이 어긋남 없이 일정한 의미를 포착하게 해야 할까, 아니면 더 많은 질문으로 뻗어 나가게 해야 할까? '사진가'의 사진들은 대부분 분명한 사회적 사건을 계기로 촬영한 것이지만, 사건들을 직접 가리키거나 단번에 알아보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현실의 기록이지만 현실을 설명하지 않는 이 사진들을 전시를 통해 말하게 할 수 있을까? 각 전시 공간들은 이런 질문들에 근거한 몇 가지 실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방의 사진들은 그것이 가리키는 현실에 대해 좀처럼 말을 꺼낼 것 같지 않다. 무엇을 촬영했는지 알아보기 어렵진 않지만, 이미지만으로 공통의 주제를 찾아내긴 어렵다. 각 사진의 정보량은 매우 적고 읽어낼 만한 정서가 드러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흩어질 사진들을 한 공간에 모아놓았을 때 공통으로 붙잡을 거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예의 그 부재감이 사진들을 채우고 있으며, 그 부재감과 연결된 밋밋하지만 없다고 할 수 없는 아주 미세한 힘들이 엄존한다. 그 힘은 누런 개의 살짝 부른 배, 흐릿한 바다 위의 약간 덜 흐릿한 형상, 습기 찬 온실의 적당히 이국적인 식물, 물결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 두 다리 등에서 추려지는 힘이다. 그것은 미세한 강도()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 없는 차이, 굳이 생경한 이름을 붙이자면 '약간임'(영어로는 littleness에 가까운 의미) 정도가 될 것이다. 혹은 철학 개념으로 하면 '이것임(haecceity, thisness)'에 가깝다.[2]눈에 띄진 않지만 눈에 밟히는 사진적 실체(entity), 분명 일상적 장면과는 다르지만, 그 이유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은 미세한 차이의 덩어리들이 이 분홍색 방을 채우고 있다. 그리고 뒤늦게 (다른 방에서) 이 이미지들이 가리키는 현실의 사건들을 텍스트로 확인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상대적으로 그 사건들을 훨씬 무겁게 느낀다. 첫 번째 방에서는 이미지들 사이를 가볍게 넘어 다닐 수 있었지만, 사건의 무게를 확인하는 순간 이미지와 현실 사이의 엄청난 괴리감, 어쩌면 배신감마저 느낄 수 있다. 그 괴리감은 사진 이미지들에 말을 붙일 수 없었기 때문에 더 커졌을 수 있다. '사진가'는 자신의 사진에 대해 "이 풍경과 저 사실 사이의 아무 상관없어 보임이 의미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라고 물은 적이 있다. '상관없어 보임'은 아마 '이것임'과 '무거움' 사이의 큰 낙차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같은 방의 긴 가구에 놓인 수백 장의 사진들은 다름 아닌 그 낙차를 세분하여 경험하게 하는 스펙트럼이다. 모두 밀양 송전탑 반대 시위 현장 혹은 인근에서 찍은 이 사진들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나무의 이미지에서 시작하여 마을의 풍경들을 거쳐 시위와 대치의 장면들로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강제철거 현장의 격한 기록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스펙트럼은 여전히 답보다는 질문으로 데려간다.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현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시위 현장에 우두커니 서 있는 평범함 나무와 과격한 시위 문구가 적힌 현수막 사이에서 무엇이 진실에 접근하는 입구가 될까? 사진은 현실을 끌어당기지만, 그것은 곧 진실일 수 있을까? 방대한 스펙트럼은 하나의 답이 되지 못한채 그만큼 방대한 질문으로 남겨진다. 하지만 어쩌면 사진의 관객을 현실에 다가가게 하는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일지도 모른다.
 
밝은 방에서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면, 사진들은 미세한 강도로 속삭이는 것이 아니라 큰소리로 외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무가 기괴하게 자라나있고 자동차가 버려져 있는 텅 빈 후쿠시마(30, 32, 53, 55, 58)나 세월호와 관련해서 모여든 사람들(34, 36, 40, 42), 개발에 의해 사라질 혹은 어색하게 남은 풍경(28, 41, 56, 57, 59, 60), 시위나 장례의 풍경(43, 49, 50, 63) 등은 새된 경고의 목소리처럼 읽힌다. 그러나 아무리 목소리가 달라졌다고 해도 '사진가'의 사진이 현실에 대한 직설적 웅변이나 온전한 명제인 경우는 드물다. 이 사진들은 사진이 잘라낸 현실의 한 토막이 전체를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진의 부분성과 한계를 강조하려는 듯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전체 풍경이 아니라 장면 일부에 집중하고 있다. 게다가 잘 살펴보면 첫 번째 방의 사진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부재감을 드러낸 사진들도 많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사진들이 다르게 읽힐까?  
 
거의 동일해보이는 네 장의 흑백 초상 사진이 있다(27). 첫 번째 방에서 '이것임'의 감각을 체득한 예민한 관객이라면 이 사진들에서 미세한 동작과 의식의 변화를 알아차릴 것이다. 그 변화는 인접한 사진들로 옮겨가고 되돌아오는 행위를 (여러 번) 반복할 때 포착된다. 작고 깜깜한 방 안에는 나무와 풀숲이 웅성거리고 있다(29). 각각은 조금도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식물들이지만, 이들이 군락을 이루자 이상한 반사광, 생경한 형태 등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점차 위치, 주변 건물, 표시선 등의 인공적 요소들이 이상함을 보탠다. 이 식물들은 제주 4·3, 오키나와, 밀양 송전탑 시위, 상계동 개발 현장, 백남기 농민이 살았던 보성 등 각기 다른 비극의 장소에서 찍은 것들이다. 하지만 군락의 형태적 기괴함이 비극의 편재성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이, 보는 이는 사건들 사이의 '상관없음'을 잊게 된다. 길고 음산한 방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두 장의 사진이 도사리고 있다. 두 사진 사이에는 인접함과 크기 외에 아무런 연결지점이 없지만, 그 단순한 요소들이 두 사진을 같은 방법으로 읽게 만든다. 얼굴로 인해 나무는 초상처럼 표정을 갖고, 나무에 비친 빛으로 인해 얼굴에 반사된 빛에 눈이 간다. 그리고 텍스트를 읽으면 살을 부비고 살던 이의 부당한 죽음이 파고든 얼굴(47)과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농성장에 있던 나무를 파고들어 고사시키는 외래종 나무(48)를 한 덩어리로 묶게 된다. 그리고 나면 위에서 말한 사진들의 강도가 이 두 초상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깨닫는다. 양쪽 벽의 사진들은 강한 두 개의 자석의 주위의 쇳가루처럼 늘어서 있다. 그리고 각 사진도 인접한 다른 사진들과 함께 목소리를 내는 각자의 자성을 갖게 된다.
 
나는 사진가를 지우고 사진 이미지 안에 가능한 한 오래 머물러보려 했다. 이 이미지들은 부재감을 드러내는 방식에 따라 분류될 수 있었으며, 오로지 힘의 미세함만으로 묶이기도 하고, 인접한 사진들에 의해 목소리를 바꾸기도 했다. 그것은 컴퓨터가 사람의 의도를 전제하지 않고 이미지들을 무작위로 조합해서 의미를 솟아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 과정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미지 읽기는 우리를 다시 사진가로 되돌아가게 한다. 사진 이미지에서 '이것임'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사진가의 가장 미세한 목소리를 듣는 것이며, 그의 힘 조절 자체를 하나의 유의미한 수행으로 보는 것이다. 또 사진을 모으고 분류하고 배치한 효과를 읽는 것도 사진가가 사진을 촬영하는 행위뿐만 아니라 조합하고 재구성하는 행위까지 의미심장하게 보는 것이다. 그래서 허무하지만(그러나 이것이 개인전을 위한 글이라는 점에서는 다행히도) 우리는 홍진훤으로 되돌아온다. 그는 늘 그곳에 없는 것, 뒷모습, 평평해져 버린 비극의 현장을 고요하고 밋밋하게 촬영하지만, 그 사진들을 다시 보정하고 새로 출력하고 재분류하고 전시하는 행위를 통해 의미의 요철을 만든다. 그래서 홍진훤이 자주 말했듯 그에게서 사진가와 기획자의 행위는 구분되지 않는다. 그의 사진을 읽기 위해서는 그의 촬영의 궤적을 따라가야 할 뿐만 아니라 전시와 프로그래밍의 과정들을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다. 차가운 시선으로 이미지를 읽을수록 사진가의 뜨거운 궤적을 보게 되는 것, 홍진훤의 사진을 읽는 경험은 그렇게 압축될 수 있다.    
 
 


[1] 괄호 안의 숫자는 전시장바닥에 표기된 작품 번호이며, 전시장 내에 각 번호에 붙인 설명 텍스트가 있다.  
[2] '이것임(h(a)ecceity, thisness)'은 둔스 스코투스가 정리한 개념으로, 현대 학자들은 이 개념을 존재, 개체, 기호 이론 등으로 발전시켰다. 흥미로운 것은 찰스 샌더스 퍼어스(Charles S. Peirce)가 '이것임'을 "인덱스가 가리킬 때의 대상으로, 연속적인 자기동일성과 '힘있음(forcefulness)'으로 인해 다른 것들과 구분되지만, 두드러진 특징은 갖지 않는 것"으로 설명했다는 점이다(C. S. Peirce, The Regenerated Logic, 1896, CP 3.434). 사진이 본성상 현실을 가리키는 인덱스라고 한다면, 모든 사진은 다름 아닌 이 '이것임'에서 시작한다. 많은 사진가들은 거기에 새로운 기법과 조명과 효과들을 더하곤 하지만, 홍진훤은 이 시작 지점에 아직 더 캐낼 것이 있다고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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